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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예수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마27:38-44/눅23:39-43)-210328낮(고난주일, 1,2부)

작성자소로(小路)|작성시간21.03.13|조회수1,449 목록 댓글 0

                                                      예수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

210328고난주일(1,2부)                            (마27:38-44/눅23:39-43)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8-44)아멘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9-43)아멘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 서울대학 병원에서 일하시는 원목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병원에서 일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병원에서 10년 동안 투병생활하면서 입원하여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입원하였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돈, 고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12번 하였습니다. 한번은 아예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넣는 냉동실이 가득 차 있어서 들어가지 못 하였습니다. 시체실 바닥에 시신을 놓아두었습니다. 아침에 직원이 그 날 나가는 시신을 꺼내고 목사님 시신을 넣으려고 보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전날 냉동실에 넣었으면 죽고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하여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 자기처럼 고난을 받고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고난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늘 위로의 말을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수술을 앞두고 걱정하는 환자에게는 기도하고 나서 말해줍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시체실까지 갔었어요.”

장기 입원하고 있는 환자가 짜증을 부리면 말합니다.

 “나는 10년 입원하였었지요.”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환자들이 큰 위로를 받곤 합니다. 지금 수술 들어가는 환자나 장기 입원환자나 지금 자기 앞에서 자기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은 수술을 했고, 죽어서 시체실 까지 가고, 장기 입원했어도 지금 자기 앞에 멀쩡히 살아서 자기를 위로해 주니까 희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환자분들이 큰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인생들의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은 우리보다 더 큰 억울한 일을 당하셨고, 우리는 감당 못할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고, 온갖 수치와 조롱과 침 뱉음을 당하셨고, 죽으셨다 무덤에 삼일 간 갇히셨다가 다시 살아 부활하셨기에, 억울한 일 당한 인생도 위로가 되며, 애매히 고난당하는 이들도 위로가 되며,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도 위로를 받으며, 수치와 능욕을 당한자도 위로가 되며, 죽음의 두려움 앞에 있는 사람도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주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도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입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암으로 죽기 직전에 성직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내세를 공부하다가 구원의 확신을 받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죽음 앞에는 명예와 직위가 필요 없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구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부자도 죽고, 세계 최고의 부자도 죽습니다. 생명은 돈으로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요, 구원자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계신 현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을 실 때 그 아래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마27:39-40절을 읽겠습니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갑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극심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은 인생의 고난 중에 최고의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아래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은 아무리 아파도 나만 아니면 됩니다. 머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화가가 그린 <바보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보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그림에 대해 전문가이신 이연호 목사님의 해설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에 나타난 예수님의 눈은, 사람들을 너무 불쌍히 여겨서 눈물에 찌들려 한쪽 눈이 찌그러졌고, 입술은 메말라 터져 있으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사랑한 나머지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예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십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12영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내려오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저항 한번 안 하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모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밑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지나가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뿌리를 내린 사람인가요? 지나가는 사람은 뿌리가 없고 뿌리가 없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뿌리를 내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녀손들, 자손들도 대를 이어 이 제단에서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겨울철에 보리가 파릇파릇 나옵니다. 그러면 보리밭에 들어가서 사정없이 발로 짓밟아 줍니다. 농사를 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겨울철에 보리를 밞아 주지 않으면 뿌리가 서릿빨 때문에 들떠서 말라 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돋아난 줄기와 뿌리를 사정없이 밟아 주어서 땅에 뿌리가 내리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줄기가 강해집니다. 그리고 뿌리가 단단히 내려집니다. 그래서 보리 에 이삭이 많이 달려도 줄기가 그 무거운 알들을 능히 지탱할 정도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자세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단순히 지나가면서 모욕이나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님 옆을 지나가면서 모욕하던 이들은 지금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펄펄 끓는 지옥불속에서 땅을 치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내가 그 분 옆을 지나갔었어. 그 때 그 분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내가 놓치고 뜨거운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는구나!”

 

 혹시 여러분도 생명 되신 예수님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족들도 교회 옆을 지나가고만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옆을 지나 지옥으로, 교회 옆을 지나 음부로 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요지입니다. 길목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교회 마당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오면서, 어른들은 볼일을 보고 오가면서 도로로 가기보다 우리교회 마당을 밟고 지나갑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종종 들곤 합니다. 저들이 지나가지만 말고 우리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배하며 하나님 섬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님 달리신 십자가 밑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그냥 지나가니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 예배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면 그냥 지나가는 자입니다. 그런 안타까운 성도는 한 분도 안계시기를 축원합니다.

 

 

2. 희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마27:41-43절을 읽겠습니다.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 십자가 아래에는 희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합심하여 희롱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희롱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입니다. 대제사장은 세습제, 종신제입니다. 아버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아들이 대제사장직을 물려받습니다. 세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정치적으로 대제사장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니까 대제사장을 여러 사람을 임명하였습니다. 물론 돈 주고 팔기도 하였습니다. 로마는 꿩 먹고 알 먹고 입니다. 그래서 사이비 대제사장이 많았습니다. BC 37-AD26년 까지 63년 동안 대제사장이 28번 바뀌었습니다. 63년이면 겨우 두 세 명 정도 대제사장이 나타날 기간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지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은 희롱을 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희롱 받고 있는 이들이 생명 되신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만 하였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아가는 바리새인들로부터 희롱을 받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들은 정치 세력에 아부하며 이리 붙고 저리 붙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할 장로들이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공의를 따르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희롱 받고 있는 이들이 주제도 모르고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의 원어는 ‘흉내 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흉내만 내는 사람이 아닌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고난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기도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헌금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전도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봉사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믿는 흉내만 내고 있지 않은지요?

고난에 동참한다며 아파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선한척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희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흉내만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생명을 얻지 못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3.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마27:44절을 보겠습니다.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 양쪽 옆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강도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강도 사이에 못 박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본문 눅23:39-43절입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두 강도는 십자가에서 6시간 매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같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강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욕합니까?

행악자들, 강도들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욕하고 있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자기들과 똑같은 줄 아나봅니다. 흉악한 죄인들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욕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곧 죽을 존재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욕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 남을 비방하고 욕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이 많으면서 남 비방하고 욕하고 그러지는 않은지....죄 값으로 곧 지옥 불에 던져질 죄인이면서 자신을 죄악가운데서 건지시러 오신 거룩하신 예수님과 그분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욕합니다.

 

 

4. 구원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께 욕을 퍼부었고, 한 강도는 급격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불과 6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입니다.

 

 마23:39-40절입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한 강도는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같이 욕하다가 욕하는 강도를 욕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급격한 변화입니다. 처음부터 오른 편 강도가 예수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 옆에 달려 있다가 그는 변화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옆에 있다가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정말 행운이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로 살아 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서워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깨끗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눅23:41절을 봅니다.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지만, 한 강도는 깨닫지 못 하였는데, 한 강도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축복이 되었습니다. 지옥 갈 사람이 천국가게 되었습니다.

 

 강도는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눅23:42절입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눅23:43)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모하는 영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하니까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살려 달라고 하니까 살려 주셨습니다. 이 강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았습니다.

 

40절을 읽겠습니다.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왼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그 큰 은혜를 받았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욕하는 이들을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서슴없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합니다. 참으라고 했으니까 참아야지 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조롱받고 욕먹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욕할 때는 참아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우리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왼편강도를 책망한 오른편 강도처럼.. 우리도 꾸짖어야 합니다.

 너희가 죄인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느냐? 죄가 없으시면서도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조롱하느냐?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셨으면 우리도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 육신의 부모님을 욕하고 조롱한다면 여러분은 참습니까? 누군가가 내 형제를 모독하면 침묵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나를 욕하는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왜요? 나도 불효자이니까요? 세상이 나를 조롱하고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왜요? 나도 죄인이니까요? 그러나 오른편 강도의 말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잖아요? 그분은 거룩하시잖아요? 그분은 더러운 인간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셔야 될 분이 아니잖아요? 지옥에서 건저 천국에 이르게 하신 그 큰 사랑을 받았잖아요...이제는 그 누구라도 여러분이 듣는데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교회를 욕한다면 꾸짖으세요! 당신이 허물 많은 죄인이면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욕하느냐고!.....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현장에 우리는 있습니다. 그곳은 곧 구원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 앞에서 그냥 지나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롱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흉내만 내는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욕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비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수많은 이들이 지나갔고, 수많은 이들이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이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난 주일, 주님의 고난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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