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망 우리 주 예수님
220109낮(1,2부) (로마서15:13)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아멘
오늘 이 시간에는 <세상의 소망 우리 주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은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따라 해보실까요?<세상의 소망 우리 주 예수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희망에 의해서 행해진다. 옥수수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어떤 농부도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총각도 어린이를 가질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아내를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장사꾼도 이익을 얻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희망의 신학”을 주창한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은 희망이 의존하는 기초이며, 희망은 신앙을 배양하고 유지시켜 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는 믿음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지만, 희망은 수위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인 희망을 품을 것을 역설했습니다.
또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도 인간을 정의하기를 “희망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꿈과 희망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동물은 먹을 것만 주면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먹을 것만 가지고는 살지 못합니다. 희망을 먹어야 살고, 꿈을 가져야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왜 자살합니까?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자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살을 보류한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희망”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희망차게 살고 싶지만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또 인간의 힘으로는, 인간의 힘만 가지고는 누구도 그 희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국민일보 2022년 1월 6일자 신문에 ‘고독사(孤獨死) 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서울 강남구 6평짜리 원룸에서 삶을 마감한 30대 이수철(가명)씨의 가장 큰 목표는 취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머물던 방에는 빈 소주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로 수북한 종이 뭉치가 발견됐는데 생전 작성해 둔 이력서 150여장이었다. 멀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찍은 증명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그 모습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지도 못한 채 그는 고단하고 짧은 삶을 마감했다. 희망 없는 현실 앞에 청년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 고독사 현장에 '헛된 꿈은 독이다', '아프지 않은 인생은 없다' 등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더 좋은 스펙을 쌓아가며 살고 싶었습니다. 제 꿈을 위해 노력도 했고요.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일까요?”
“저는 무섭습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마지막으로 남긴 20대 취업준비생 김민정(가명)씨의 죽음은 ‘청년 고독사’의 한 단면이다. 그는 외로웠고, 가난했고, 취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울했다. 숨진 뒤에도 김씨를 찾는 이는 없었다. “앞집 베란다에 며칠째 사람 형체가 그대로 서 있다”는 이웃의 신고로 겨우 발견됐다. 집을 정리하는 사흘 동안에도 고인을 찾아온 이는 없었다. 장례는커녕, 그가 남긴 글을 읽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고인은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돼 공영장례를 치렀다. 청년 고독사 현장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알아볼 수 있다”며 “이력서, 수험서, 대학 졸업장 등이 많이 발견되는데 대부분 취업 문제로 인한 극단적 선택 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허름한 원룸촌에서 숨진 30대 장한미(가명)씨 방에도 미래를 그렸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장씨는 원하는 직장 취업에 거듭 실패한 후 자격증을 준비했다고 한다. 장씨가 떠난 방에는 작은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취업난은 경제난으로 이어진다. 이씨의 방에도, 장씨의 방에도 수개월간 연체된 공과금 독촉장이 수두룩했다. 일자리를 못 구해 돈을 벌 수 없었던 청년들의 삶은 궁핍했다. 고시텔을 전전하던 30대 신명진(가명)씨는 공기업 입사를 꿈꾸던 취업준비생으로, 또 다른 이름은 ‘N수생’이었다. 가까스로 대학에 입학해 졸업했지만, 그는 끝내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서랍에는 한 프랜차이즈 식당의 명찰이 들어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격증 공부를 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의 죽음은 한 달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청년 고독사 문제 해결을 위한 보건·의료계 공동행동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동안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진료 받은 환자는 170만 명이었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20, 30대가 가장 많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 30대의 우울증 상담 건수는 2019년 22만3000명에서 2020년 43만5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길해용 유품정리업체 스위퍼스 대표는 5일 “10년 전만 해도 유품 정리 현장의 70%가 중장년층 고독사였다면 지금은 절반 이상이 20, 30대”라고 전했다.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기사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서고, 세계경제대국 10위권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20, 30대 청년들이 꿈도 펴지 못하고, 취업의 문턱에서 스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나라였음 좋겠습니다. 이 사회가 우리 청년들에게 희망을 씨앗을 틔울 수 있게 해주는 사회였음 좋겠습니다.
어디 20,30대 청년들만의 문제입니까? 2년여 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 국민들이 희망을 잃고, 하던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고, 빚만 늘어나고,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도 막막하고, 코로나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상공인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필요한 희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 희망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시간 말씀 통하여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품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한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시다.” 믿으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요, 세상의 희망이십니다. 희망은 가장 먼저 예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39편 7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찾아와서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신 때는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신 곳은 로마의 지배를 받아 무척 어렵게 살아가던 유대 땅 베들레헴 마을이었습니다. 이런 절망의 처소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들에게 먼저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예수님,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공생애 첫 말씀이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이 뭐냐, 잃어버린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첫 아담이 범죄 함으로 잃어버린 천국, 내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서, 구세주로서 천국을 주러 왔노라. 회개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사렛의 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런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입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소경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마 11:5).
예수님은 복된 소식을 가져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이었던 인간들이 이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중생 하는 그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하셨습니다. 매 맞으셨습니다. 가시관 쓰셨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 허물도 없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 너의 죄를 다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나의 허물 너의 허물을 다 씻어 주시기 위하여, 내가 당해야 할 저주, 네가 당해야 할 저주를 다 짊어지시기 위하여, 내가 아파야 할 그 병 네가 아파야 할 그 병, 고통을 다 짊어지시고 치료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희망. 이제 멸망 받을 자가 구원받는 희망.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능한 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가 기도하면 성령 충만함 받아 능력과 권능을 얻는 희망. 병든 자가 ‘치료’받는 희망. 저주받아 가난한 자가 ‘부요’한 희망. 죽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가 ‘영생 복락’을 얻는 희망.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어떤 고난도 이겨 내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러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우리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부활할 수 있는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영원한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희망을 갖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사탄이 부하들에게 인간을 공격하는 각종 무기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공격하는 무기가 뭘까요? 황금. 돈. 술. 마약. 미녀.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기에 꼼짝을 못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 사탄이 말합니다. “그것보다 더 힘 있는 도구가 있다.” 그 부하들이 말합니다. “뭡니까?” “뭡니까?”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그때 그 사탄이 낡은 도끼 한 자루를 가지고 옵니다. “이거다.” 그러니까 부하들이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아니 똑똑한 인간들이 그 낡은 도끼 때문에 패할 수 있나요? 그것은 좀 의심스러운데요?” 그럽니다. 그때 사탄이 말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용한 것 중에 가장 좋은 비밀병기다.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인간을 얼마든지 넘어지고 쓰러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하들이 더 의심하는 겁니다. “저것이 무얼까?” 궁금해 하는 겁니다. 그때 그 사탄이 말합니다. “이 도끼는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희망의 줄을 끊는 도구다.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희망을 끊는 도구가 이 낡은 도끼다. 이 낡은 도끼를 가지고 인간 마음속에 있는 희망의 줄을 끊어버리면 안 넘어지는 사람이 없다. 우리 밥이 되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희망을 얻고 줄기차게 그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희망을 먹고,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로마서 15장 4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은 성경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119:105절에 말씀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 소망 갖게 됩니다. 질병에서 치료받을 소망을 갖게 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온갖 절망을 딛고 일어설 소망이 우리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희망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언제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2. 기도하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13절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기도에 힘쓸 때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그로인하여 즐거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대절망 속에서라도 하나님 앞에 때로는 금식하면, 아니면 철야하면, 아니면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면, 절대절망이 물러가고 절대희망으로 희망을 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말씀합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10).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니리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인 것입니다. 자신 있는 사람과 말하면 듣는 사람도 저절로 자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성공의식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자신이 생겨서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희망의 하나님과 대화하면 우리 속에서 줄기찬 희망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믿음이 내 믿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늘 안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듣는 사람도 안 되는 것입니다. 늘 불평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감사하던 사람도 불평하게 됩니다. 늘 자기가 받은 상처만 얘기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듣는 사람은 늘 상처만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희망의 사람은 남을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희망의 사람은 남을 유익하게 해주고, 희망의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망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고, 희망의 사람은 부지런합니다. 희망의 사람은 절대 게으르지 않습니다. 희망의 사람은 일을 피하지 않습니다.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사람은 의무만 겨우 감당하지 않습니다. 의무를 초월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절망도 우리의 이런 희망을 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어려우면 “이제 망했다” 그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우리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를 인내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희망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희망은 환경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에 희망을 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우리는 희망을 자주 말해야 합니다.
한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희망을 날마다 입으로 말하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소망’(골 1:23)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생의 소망’(딛 1:2)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복스러운 소망’(딛 2:13)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자주 생각하고, 계속 생각하고, 그 뿐 아니라 입술로 계속 말해야 합니다. 희망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믿음을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소망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소망 없는 말은 아무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아무리 하더라도 소망 없는 말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격언이 나왔는지 몰라요. “침묵은 금이다.” 소망 없는 말을 할 바에는 침묵이 금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기서 6장 26절입니다.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이다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에 얽매입니다. 과거의 실패에 얽매입니다. 과거의 성공에 얽매입니다. 과거의 부요함에 얽매입니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입니다. 과거 세상에서 즐기던 쾌락에 얽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은혜 받은 것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얽매여 살다, 과거만 돌아보다 광야생활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과거의 문을 닫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 인생의 미래의 문이 열립니다.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를 말하십시오. 희망을 말하십시오.
희망의 말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장미꽃을 피게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의 말은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만 사는 게 아니라,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희망보다 더 큰 자산은 없습니다. 어려울 때도 희망을 품는 사람은 환경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희망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시편 146편 5절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이 나라와 민족의 희망입니다. 다시는 나라를 잃는 절망,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 자유민주주의 몰락이 이 민족과 나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의 희망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경제력에 있지 않습니다. 우방국에 있지 않습니다. 정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 나라를 지켜주시고, 희망이 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교회를 보고 돌아가며 그들이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귀한 것을 배워 갑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돌아가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을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정치하는 것 보세요. 하는 짓을 보면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기적입니다. 그러나 망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렇게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다른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밤낮 부르짖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희망, 예수님이 세상의 희망으로 알고 날마다 희망을 먹고, 희망을 품고,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전하고. 그 희망 그 자체가 우리 삶의 현장에 최고의 능력이요, 권능이요, 힘으로 알고 당당하게 살아날 갈 때 원수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쫓겨 나가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질병이 떠나 건강이 되고, 가난이 변하여 부요가 되고, 미움이 사랑이 되고, 우리 삶에 날마다... 날마다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소망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소망이십니다. 금년에도 작년에 이어 우리 교회 표어가 <세상에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세상에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고, 성도들이 되고, 임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절망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금년 한 해도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임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날마다 희망이 꽉 차서 희망 속에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