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들의 성탄절
241222낮(성탄주일) (마태복음2:1-12)
<1)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아멘
첫 번째 성탄절은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였습니다(마2:1). 본문1절에 “1)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그리고 그들 중에도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메시아의 오심을 가장 기뻐하고 가장 먼저 축하하지 않을까 싶은데... 의외의 사람들이 첫 축하객이 되었음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성탄의 첫 축하객이 된 동방박사들의 성탄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성탄절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별을 따르되 끝까지 따라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찾아 왔습니다. 그들이 온 거리인 페르시아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약 800km나 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번 왕복한 거리만큼 됩니다. 그 먼 거리를 새로 탄생하신 왕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를 길을 잃지 않고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별만 보고 따라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자 더 이상 그 별을 보지 않고, 왕궁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별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왔으니 이제는 왕은 당연히 왕궁에서 나셨을 것이고, 그곳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큰 실패의 경험입니다. 우리는 이 경험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는 분명히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 땅 중에서도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미가5:2) 그런데도 그들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상식을 따랐습니다. 잠시 잠깐의 이 실수로 나중에 예수님도 위험에 처하게 되어 애굽으로 급히 피신하시게 되고, 당시에 태어난 두 살 아래 아기가 헤롯에 의해 모두 학살당하는 참상을 가져오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끝까지 별만 보고 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는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테고, 두 살 아래 영아들이 살해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여기서 별을 따르되 끝까지 따라야 함을 교훈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 “그의 별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별이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2,7,9,10절). 여기서 별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민 24:17, 계22:16).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되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경험과 상식이 우선될 때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 ‘왕은 왕궁에서 난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과 지식, 경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여지없지 무너지고 맙니다. 수십 년 동안 믿어왔던 믿음... 말씀을 따라 살고, 예수님만 바라보던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깨어서 막아내야 할 것은 내 안에 당연한 상식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과 일반화가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되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시선을 세상에 빼앗기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동방박사들처럼 분명한 성령의 가르침이 있고, 말씀이 있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별,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 생각, 내 상식, 내 판단으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막대한 손해와 손실을 나 뿐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은 말씀에 기록된 대로 믿고, 예수님만 끝까지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소동하는 것이 맞습니까?
본문 3절입니다.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나셨다는 소식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습니다.
“소동한지라(3절)” : ‘타랏소’인데... ‘뒤흔들리다, 당황하게 하다, 무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헤롯과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대하던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나셨다는 소식에 기쁨이 아니라 극심한 불안과 공포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힘들게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에돔 사람이고 보니 언제 헤롯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박탈당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잃는 것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세 아들과 아내와 처남과 장모까지 죽였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자신이 아닌 다른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고 하니 경악할 정도의 소동(disturbed)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왜 소동했을까요?
예루살렘의 소동은 헤롯왕을 동정한 것이 아니라 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어지는 전쟁과 혼란의 공포 때문입니다. 새 왕이 나셨다고 하니 정국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기쁨보다 세상 여러 형편들의 유불리(有不利)를 계산하다보니 소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나의 손익계산부터 따져보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누릴 것들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요?
세상 것들에 취해 정작 주님이 오셨을 때 기쁨으로 영접하기보다 첫 번 성탄절의 헤롯왕이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소동을 피우는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아기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본문 2절과 11절을 읽겠습니다.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은 왕관도 없는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거기에는 모친 마리아도, 부친 요셉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경배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이들에게 경배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탄절이 어떤 날 입니까?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추호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우리도 경배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님이 잠들어 있는 말구유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 각각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아주 값비싼 것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왕께 예물을 바치듯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해 최고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들이 바친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예수님의 왕권과 제사장권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저 출석부에 사인이나 한다는 식으로 형식적으로 예배가 드려지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매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최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찾아 왔습니다. 그들이 온 거리인 페르시아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약 800km나 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번 왕복한 거리만큼 됩니다. 그 먼 거리를 새로 탄생하신 왕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불과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기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주님께 경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먼 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께 경배하기 위해 목숨도 걸었는데 거리가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일로 주일을 지키지 않거나,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주님께 드릴 예물을 준비하셨는지요? 여러분도 믿음의 고백이 담긴 예물을 드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4.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다른 길로 갔습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12)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여기에 “다른 길”은 지금까지 왔던 그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을 그대로 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 믿으면 전혀 새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죄악의 길을 그대로 가면 안 됩니다.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잘 못 살아왔으면 이제는 잘 살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자기들이 왔던 그길로 가면 익숙하고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죽는 길이었습니다. 자기들도 위태롭고 아기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불편하고, 낯선 길이었지만,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이 꿈에 지시하신대로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죄 많은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난 후 다른 길을 갔습니다. 죄 많은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난 후 다른 길을 갔습니다.
예수 만나기전의 길을 예수님 만난후도 똑같이 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만나기전 삶과 예수님 만난후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다른 길을 가야 동방박사들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예수님 오시긴 전과 예수님 오신 후로 나눕니다. 예수님 오시기전 인류를 기원전이라고 하고(B.C) 예수님 오신 후를 기원후(A.D)라고 합니다. B.C는 알다시피 ‘before Christ’, 즉 ‘그리스도 이전’이란 의미입니다. AD는 ‘anno Domini’, 즉 ‘주님의 해’란 뜻입니다.
기원전과 기원후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원전은 시간을 거꾸로 센다는 것입니다. 기원후는 바로 셉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우리의 삶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난후의 삶은 바르게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 만난 후에도 인생을 거꾸로 살면 안 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던 인생을 돌아서서 바르게 가야 합니다. 동방박사들도 헤롯왕에게 거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바르게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살고 아기 예수님도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진정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로 쉬운 것이 있다면 마음 뒤집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로 어려운 것도 마음 뒤집기입니다. 미움도 뒤집기만 하면 사랑입니다. 불충성도 뒤집으면 충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마음을 만드신 주님을 만날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님은 그 부친이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무당춤을 추고 있는데 한 전도자가 지나가다가 그 꼴을 보고 "자식들 멸망할 짓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너나 잘 믿고 너나 천당이든 백당이든 잘 가거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에 돌아가서입니다. 그 무당의 마음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음성은 "자식들 망할 짓 그만 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라" 이 소리가 귀에 계속 들리는 것입니다.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기 시작했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를 찾았고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바로 그 아들 백낙준을 박사로 만들고 국가와 교회에 이바지하는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바울이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핍박자가 순교자로 변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방탕아가 사명자가 되기도 합니다.
성탄의 주님을 만난 동방박사들처럼 이제까지 온 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길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