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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5.29.)

작성자김윤태|작성시간19.12.03|조회수11 목록 댓글 0

김사집 프란치스코(5.29)


성인명

김사집 프란치스코 (-Francis)

축일

529

성인구분

복자

신분

양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44-1802

같은이름

김 프란치스코, 김프란치스코,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사집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책들은 하나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김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매질을 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0,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있어 김 프란치스코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125(음력 18011222),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신 · · 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8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http://maria.catholic.or.kr-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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