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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샤스탕 야고보(9.20.)

작성자김윤태|작성시간19.12.03|조회수7 목록 댓글 0

샤스탕 야고보(9.20)

성인명

샤스탕 야고보 (Chastan Jacobus)

축일

920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3-1839

같은이름

샤스땅,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정아각백, 제임스




성 쟈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10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양떼 지키는 일로 부친을 도왔다. 그는 1823년에 신학교에 들어가 3년 만에 성품성사를 받고, 이듬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고 프랑스를 출발하였으나,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중,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Manbant, ) 신부로부터 입국의 안내를 적은 편지를 받았다. 1836년 말 조선의 교우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을 통과한 후,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대합니다.” 하며 자신의 기쁨을 토로했다. 상복 차림을 하고 15일 동안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를 만나 자신들의 봉헌과 희생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어의 초보를 배우기 시작하고, 2개월가량 성찰규식을 외운 다음 조선말로 백 명가량의 신자들에게 첫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 후 샤스탕 신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 1837년 한 해에 영세자 1237, 고해자 278, 영성체한 사람이 1950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하였다.

   이윽고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체포되고 이어 자수를 권고하는 주교의 편지를 은신처에서 받았다. 앵베르 주교의 권고를 따라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96일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21일 성 마태오(Matthaeus) 축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샤스탕 신부와 다른 두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고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들의 유해는 1843년에 발굴되어 삼성산에 안장되었다가 시복 수속이 진행된 1901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옮겨졌고, 같은 해에 다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 그는 192575일 교황 비오 11(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http://maria.catholic.or.kr/-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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