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란 뜻으로,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에서 기생을 말한다.
路 : 길.... [노]
柳 : 버들 [류]
墻 : 담.... [장]
花 : 꽃.... [화]
길거리의 버들이나 담 밑에 핀 꽃처럼
뭇 남정네 손에 꺾이기 쉬운 연약한 꽃이고,
시들면 버려지는 서글픈 꽃이 기녀였다.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알아 듣는 꽃이란 뜻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연꽃을 구경하다 양귀비를 가리키며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연꽃이 어찌 나의 해어화(解語花)만 하겠느냐”고
해서 생긴 말이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도 해어화란 기생이 등장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기녀(妓女)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는것은 추운 겨울에도 홀로 참고 견디어
눈밭에 향기을 날리는 매화(梅花) 내한매(耐寒梅),
또 달나라 선녀(仙女) 계궁선(桂宮仙),
양귀비 뺨치게 예쁘다는 승양비(勝楊妃) 등이다.
이들 기생의 주된 임무는 노래와 춤으로
잔치의 흥을 돋우는 것이나 때로는
성(性)을 제공하는 것도 책무였다.
특히 지방 관기(官妓)들은 밤이 되면
사신이나 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방기(房妓)노릇을 하였으나 이들을
일명 수청기생(守廳妓生)이라 했다.
이들 기생들은 주로 고관들의 잔치에 불려가
전두(纏頭)나 연폐(宴幣)라고 하는 팀을 받아
생활했고
옷 벗기는 값이라는 뜻의 해웃값(解衣債)을
받아 살아갔다.
조선시대에도 팀 문화가 있었고
관기들의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세상 풍속이
예전같지 않게 야박해져서 치사한 양반들이,
창기(娼妓)를 불러들여 밤새워 놀고 연패를 주지 않아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창기들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기녀(妓女)들은 양반들의 첩이 되어 일시적으로
호사를 누렸지만 남자의 애정이 시들해지면
이 양반 저 양반 품을 떠돌아 살았다.
그 예로 숙종(肅宗)때 천연두 치료로 명성을 날린
유상의 어머니도 본래 평양의 관기였다.
그 여인에게 유상을 포함해서 세명의
아들이 있지만 성(姓)이 모두 달랐다.
그래서 숙종이 놀리느라 “너희 형제는
어째서 성이 모두 다르냐?”고 물었더니,
“신의 어머니가 어려서 재주가 많아 그렇습니다”라고
답해 숙종이 웃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관기들은 또 착한 남편을 만났어도
남편이 죽고 나면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결국 남의 남자를
찾아 떠도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특히 젊어 양귀비 같은 몸매도 나이가 들면
몸매가 망가지고 미색이 바래고 나면
물 긷는 수급비(水汲婢)로 하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생에게 나이가 들면 재산과 미색과 명성은
사라지고 달콤한 말 재간 만 남는다고 했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新羅) 24대 진흥왕(眞興王)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丁若鏞)과 이익(李瀷)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百濟)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또는
기녀(妓女),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로 통용된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나 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기생의 기(妓)를 妓(기생 기) 외에
伎(재주 기)로도 표기했다.
妓(기생 기)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伎(재주 기)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 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 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妓生廳)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歌舞)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技藝)는 물론
행의(行儀), 시(詩),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 무대인,
요리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기생 죽은 넋이라는 말이 있다.
기생의 우아하고 당당한 자태를 나타낸 말로,
기생은 죽어도 볼품이 있다는 뜻이다.
반면 ‘기생의 자릿저고리’라는 말도 있다.
자릿저고리란 잠옷을 뜻하는데,
기생의 잠옷은 머릿기름과
화장분으로 지저분하기 마련이다.
외모가 단정치 못하고 말씨가
간사한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
이처럼 기생은 화려하게 혹은
초라하게 세상을 누비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남들이 이들의 희노애락을
‘기생 죽은 넋’이니 ‘기생의 자릿저고리’니
딱 잘라 극단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기생의 삶을 가장 잘 증언할 수 있는 자는
역시 기생 자신일 것이니.
기생들 사연을 들어 보면,
그들이 돈을 밝히는건 당연해 보인다.
함경도 기생 군산월은 서울에서 유배 온
선비 김진형에게 살뜰한 순정을 바쳤건만,
사내는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별주를 권하며 군산월을 내친다.
“눈물이 흘러 내려 반잔 술이 한잔 되고
한잔 술이 넘쳤구나”란 군산월의 시 한 구절은
배신 당한 기생의 아픔을 잘 보여준다.
운좋게 양반의 첩이 된다 해도
앞날은 순탄치 않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소원성취문중 별실자탄가에는
기생첩의 고통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음전하고 진중하면 대가 세다 논란이요
조용 않고 떠들면은 거만하다 수군수군
똑똑하고 어여쁘면 여우라 별명이요,
맵시 있고 간드러지면 방정맞다 쓴 말이요
잘한다는 말이 없고 칭찬 들을 일이 없네."
그러나 늙은 기생은 첩보다 더 비참한 처지다.
한 늙은 기생이 한탄했다.
"늘 봄날로 알았더니 이십 삼십 잠깐이라
날짐승 길 버러지도 다 쌍쌍 있건마는
이런 팔자 어이하여 만사 막혀 버렸는고",
뭇 사내를 치마폭에 감쌌던 명기라해도
노류장화 처지는 벗어날 수 없었다.
화사한 겉모습보다
가슴앓이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고사에 쓰인 대로 노류장화(路柳墻花)는
누구든지 쉽게 만지거나 꺾을 수 있는 꽃처럼,
주변 가에 있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존재라는 뜻이다.
기생이나 창부(娼婦)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모셔온-글/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