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고구저수지)-화개산-화개사-연군군유재지 –고산마을입구
경기도 김포 강화읍
산행일자 : 2018년 4월15일(일요일)
누구랑 : 나홀로
산행시간 : 2시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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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15 일요일 |
화계산 |
269 |
2:25 |
고구1리(고구저수지)9:50, 화개산11:05 화개약수(효자묘)11:15, 화개사, 연산군유배지, 고산마을입구11:15 |
그리운 어린 시설
가을 걷이 끝난 마을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어린 시절
긴 엿 하나씩 뚝 분질러 불며
누구 구멍이 큰지 재던 엿
집안 뒤져 찾은 고물과 바꾼
달콤한 얼음 막대 아이스께기
깡통에 슬그머니 쌀 담아가
장에서 튀겨 한줌 먹던 튀밥
저수지(貯水池, reservoir)는
농어촌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하천, 하천구역
또는 연안구역 등에 물을 가두어 두거나
관리하기 위한 시설로 홍수 위 이하의 수면 및 토지를 포함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농어촌정비법'에 의거
농업생산기반시설로 지정하여
한국농어촌공사 또는 지방자치단체를 시설관리자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진달래 그녀 앞에 마주 서면
동공(瞳孔)이 그대 가슴에 머물고
향기 가득 꽃술에 한 마리가 나비가 되고
신선이 되어 꽃 향기에 취해 보나
산자락 아낙의 꽃.
가득 웃음꽃이 채워지고
밥상에 꽃 떡을 올려놓으니
서녀의 웃음꽃이 온 동네 퍼져가네.
당신이 주신
고귀한 말씀은
한 소나무
시인의 창에
그늘을 드리우고
수직의 그림자가
수평의 그림자가
수평의 그림자와 같은
평지를 밟네,
노곤한 햇살 한줄기
머리 위에 앉는가 싶었는데
서둘러 떠나고 없다.
옛날 그 때 패이고 갈라지고 휘어진 길을 길을 걸었다.
울며불며 걸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찔레 먹고 산딸기 따먹는 사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산밤 주워먹고
다래 따먹는 사이, 가을이 지나보다.
버찌 따먹던 산 벚나무 밑은 낙엽이 붉고
바람 소슬하다.
한 세상 빠르게 흘렀구나,
비틀거리면서 무얼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가?
도깨비바늘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화계산정은 외성(1,155m)과
내성(1,013m)의 이중구조로 축조되었으며
이곳은 외성과 내성의 북벽이 교차되는 지점이며 망루로 추정되는
석축의 유적이 두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현 위치에서 북쪽 100m지점에도 망루의 전석이 남아있다.
강화나둘길
www, nadeu, gil. com
성혈(星穴)바위
성혈(바위 구명 그림) 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에 별차리, 풍요와 다산,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 마을 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행위의
흔적이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암석에 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바위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지점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강화나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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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 정상은 감시초소와 정자가 있다.
화개산정상은 해발259.6m에 불과하지만 교통도에서는 가장 높다.
화개산에서 바라본 경관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 있다.
동쪽의 교통대교로부터 오른쪽으로
석모도, 상주산, 남산포, 기장섬, 주문도, 미법도, 서경도가 차례로 보인다..
북쪽도 마찬가지다.
강화만 건너 황해도 연인군(엣 영백군)의
모습이 뚜럿하게 눈에 들어온다.
“와, 저기가 진짜 북한이에요? 진짜 가깝네요..”
정상된 설치된 만원경을 들여다보던 한 등산객이 소리쳤다.
남한과는 달리 건물 한 채 찾기 힘든 북녘 땅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약수터-효자묘자리 –화개산 봉수대이정표를 쪽으로 같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걷기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면
소홀히 하면 인체의 기능이 떨어져
각종 질병에 걸린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의학계에서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걷기의 의학적 효과는
심폐기능 향상, 혈액순환 촉진,
심장질환 예방,
체지방 감소로 인한 비만 개선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예방, 공다공증 예방,
우울증 치료, 스트레스 해소,
기억력 회복, 면연력 증가 등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겯기가 만병통치’다.
효자묘(孝子墓)
화개산성
총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석 산성으로 내, 외성을 산성이다.
포곡석 산성이란 산 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고 있는 구조를 밀하며 화개산성의
남쪽은 산 정상부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였으며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축조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1,555년 최세운이 증축하고 1,591년 이어량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였는데 사용하였으며
1737년에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상에서 200m쯤 내려오면 화개약수터가 나온다.
내 이 숲길을 걸으면서 죄 많이 지었다.
꽃 한 포기, 나뭇가지 하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산밤이나 도토리 한 톨 집으로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내 숲길을 걸으면서 죄 많이 지었다.
우선 나무와 풀 위에 두텁게 쌓인 흙을 밟아 무너지게 하였으며,
그 무너진 자리에 드러난 뿌리를 밟아 밖으로 노출되게 했다.
화개산 정상
늘 혼자 걸었다.
길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걸었다.
외롭거나 무섭지 않았다.
오직 걸어서 척추가 바로 선다면,
오래 걸을 수 있다면,
몸으로 느껴 길을 채득한다면
생각이 없어도, 글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채찍질했다.
사람과 사물을 만났다.
화개산 봉수대
본 건물을 헐어지고 담장만 남았다.
화개산 봉수대는 화개산과
잇대어 있는 연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으나
현재 낮은 석단만 남아 있는데 가로4.6m, 세로7.2m, 잔존높이 1.2m 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봉수대에서 연락을 받고 등록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대로 응한다고 되어 있다
[출쳐 : 강화군수]
문수정
문무성은 본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이 있어
두 개의 생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정의 물이 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샘물이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 (지금의 삼신면)까지 비추어
그 곳 무녀자 들의 풍기가 문란하게 되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매운 후
진정되었다고 한다. 송가도에서 이 노성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사당은 남아 있지 않다.
화개사 보호수
고유번호 : 4-9-73
지정일자 : 2008. 08 07
수령 ; 약200년
소재지 : 교통면 읍내리 489-1
괸리자 : 교통면장
나무둘레 : 1.8m
강화군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창건연대는 고려 때 라고 전하는데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독서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원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67년 다시 화재가 일어나 1968년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상륜부, 탑신부, 기단부가 모두 일석으로 이루어진 승탑이 있는데,
상륜, 옥개, 하대석의 끝처리는 마치 연잎을 두르듯이 하였다.
이 사찰에 전해오던 유물 및 서적들은 1967년 화재 당시 소실되었으며
고려시대 불상 2구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연산군 유배지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교통도도 조선시대의 유배지였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선조의 첫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님인 임해군,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과
다섯째 아들인 승선군이 교통로에 유배되었다.
흔히 유배지라 하면 거제도나
제주도 등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 등을 생각하지만
폐위된 왕들과 왕자 도상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교통도로 유배를 보냈다.
아들은 역모를 꾀할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산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오늘 모든 산행을 마친다.
여기서 70번버스를 승차하여 강화터미널 이동하여
내가 송정역에 타고 왔던 3000번 버스에 승차하여 송정역에 내려 집으로 행한다.
지금 나는 3남매를 키우면서도 힘이 드는데,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5남매를 낳아 기르며
장날이면 가락 먹고 싶은 가락국수 한 그릇 먹지 못하고 배를 주려가며
오직 논밭에서 나는 농산물만으로
‘배워야 사람구실을 한다며’ 학교를 보냈다.
일제에서 6.25를 겪은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어머니가 결어온 길은 힘겹고
고달픈 가시발길이었다.
숙명이려니 하고 한숨과 눈물을 벗 삼아 살아온
한 많은 인고의 생이었다.
오직 인내와 희생만이 여자의 부덕인 양 평생 그것만을 신봉하며
자식들을 떠닫들며 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