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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성 경: [롬3:30]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작성자김종표|작성시간19.12.17|조회수21 목록 댓글 0

 

성 경: [3:30]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29절에 '유대인''이방인'이 대조된 것처럼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같은 방식, 같은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이신 칭의를 얻는 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바울이 그동안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적절하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 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란 의미로 이해된다. 29절의 내용에서도 역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바울이 주장했던 점을 참고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3:31]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20)고 주장했으며, 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21) 주장하면서 믿음의 법(27)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背馳)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마르시온(Marcion)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저급한 신(Ialdaboath)으로 취급하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했다.

󰃨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말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지킨다'란 의미이다. 어떻게 해서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대담은 이신 칭의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이다.

 

성 경: [4: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아브라암'(*, '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헤몬'(*,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성 경: [4: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만일...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여스 에르곤 노무'(*,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 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성 경: [4: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성 경: [4: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 오페일레마)''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은 히브리어로 '맛솨아'(*)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 경: [4: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2:8).

󰃨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성 경: [4: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 경: [4: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6:1). 한편 '아페데산''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성 경: [4: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경: [4: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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