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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야기

6월 18일 집에 가자

작성자리오|작성시간26.06.18|조회수40 목록 댓글 0

6월 18일 집에 가자

한 할머니가 지병으로 쓰러졌는데, 그걸 본 손녀는 놀라서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오열한다. 정신이 든 할머니는 우는 손녀를 다독이고 괜찮다며 이렇게 말한다. ‘집에 가자.’ 이 말을 반복하며 손녀를 안심시킨다. 어느 드라마 한 장면이다. ‘집에 가자.’는 평범하고 아주 익숙한 그 대사에 마음이 움직였다. 일을 마치고, 여행을 떠났다가 우리는 집에 가자고 말한다. 이제 집에 가게 됐다고 기뻐한다. 그 집에 뭐 대단한 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은 내 모든 거, 긴장 피곤 얼키설키 얽힌 감정의 쓰레기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다. 청년 시절 마음이 복잡하면 한걸음에 뒷산 정상에 오르곤 했다. 그러면 온몸이 땀이 된다. 정상 마당바위 위에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된 옷 그대로 눕는다. 집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래도 괜찮다. 그런 곳이 아버지 집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품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그런 거처럼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 관계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분을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중에 하나로 여겼을 거다. 사람을 종으로 부리고 때론 벌레 잡듯 죽이는 그런 엄청난 능력자 신 말이다. 아니면 심판 날에 나를 내 죄대로 다루는 무섭고 엄격한 재판관 말이다. 하느님은 누구보다도 공정해야 하니 사실 그렇게 하는 게 옳기도 하다.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여전히 어색하고 서먹서먹하다. 그분 앞에서 뭐라고 그리고 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른다. 예수님에게 아버지는 당신이 청하면 다 주시는 그런 분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에게 주고, 찾는 이에게 얻게 하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다.(마태 7,7-8) 그래서 어색해도 아버지라고 부르고 뭔가 청하려고 하면 우물쭈물한다. 청할 게 아주 많은데 이런 걸 달라고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이런 우리를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바오로 사도가 알려준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맺어주신 새롭지만 당연한 관계다. 그런데 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고 어색해하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도와주신다. 입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분을 아버지로, 엄마로 대하고 느끼게 도와주신다. 드라마에서 그 할머니가 손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제 집에 가자.’를 되풀이하며 위로했듯이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 유명한 고백이 기억난다. ‘주님 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평안하지 않나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있다. 거기가 나의 진정한 집이다. 이제 집에 가자.

 

예수님, 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입니다. 그 중 딱 하나, 이웃을 용서하는 것만이 저희 몫입니다. 이웃의 반복되는 잘못과 실수를 너그러이 참고 견딜 때 하느님이 정말로 저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제 용서가 제가 용서받는 조건이 아니라 무한히 자비로운 하느님을 더 신뢰하는 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께 대한 어머니의 무한한 신뢰를 가르쳐주셔서 아드님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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