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신성한 초월
사람은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다.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우리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낫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초월의 끝, 자기 자신을 계속 뛰어넘어서, 계속 더 좋은 사람이 돼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이 되면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겠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즉 그리스도인의 지상 삶에 대한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는 예수님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윤리적 금언이나 경구 같은 말씀으로 황금률이라고 불린다. 말이 좀 복잡해서 그렇지 한마디로 역지사지(易地思之), 남의 입장이 돼보라는 뜻이다. 그것이 점점 더 수월해지고 나아가 언제나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는 걸 거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기적인 본성에서 이타적인 신성(神性)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그것은 이기심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인생 전체의 탈출기다. 그 높은 산에서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나눈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이었다. 한마디로 세상 탈출이었다. 나에게서 그리고 이기심에서 탈출,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로 가셨고, 우리는 그분 뒤를 따른다. 십자가의 길,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 고생하고 고통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게 자연스러운 이기심을 거스르려니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어렵고 마음이 부대끼고 뭐 그렇다는 뜻이다. 만일 그 길이 유별나거나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면,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 앞에서 경건해지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거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있을 때와 아주 비슷하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황금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노력,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고 헌신하신 예수님을 따르려는 수고, 이런 것들을 개나 돼지가 알 턱이 없다. 언젠가 한 공무원이 국민은 개돼지라고 하고, 한 정치인이 국민은 금방 다 잊어버리고 때 되면 또 찍어준다고 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이 고귀한 운명,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이 성소를 잊어버리니까 그들이 그런 망언을 하는 거다. 그런 그들을 욕하기 전에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자신을 뒤돌아봐야 한다.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세속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서 그 신성한 초월을 재산 증식과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걸로 바꿔버리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길이고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오늘도 나를 뛰어넘고 내일은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예수님,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저기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아서 소란스럽고 걷기도 불편합니다. 여기는 한산해서 조용하고 좋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사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역지사지가 바로 되게 도와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