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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도시의 마지막 왈츠

작성시간25.11.28|조회수1,063 목록 댓글 1

잿빛 도시의 마지막 왈츠

차가운 11월의 비가 도시의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흑백 필름처럼, 세상의 모든 색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밤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마침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낡은 작업실의 창문을 두드렸다.

"If I should stay, I would only be in your way..."

이안은 붓을 든 채 허공을 응시했다.
캔버스 위에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그의 뮤즈, 그의 구원, 그리고 그의 절망.
바로 하윤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3년 전,
이안이 무명 화가로 갤러리 구석에서 먼지만 쌓아가던 시절이었다.
하윤은 촉망받는 신진 첼리스트였다.
그녀는 우연히 이안의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절망의 끝에서 간신히 붙잡은 희망의 끈을 그린,
그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그림... 슬픈데, 이상하게 따뜻해요."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그녀의 첼로 선율은 그의 붓질에 영감을 주었고, 그의 그림은 그녀의 연주에 깊이를 더했다.
그들은 서로의 예술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었다.
사랑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잿빛이던 이안의 세상은 하윤으로 인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웃음은 가장 밝은 노란색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가장 깊은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처음부터 다른 궤도를 돌고 있었다.
하윤은 유서 깊은 클래식 명문가의 외동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지휘자였고, 어머니는 유명 음대 학장이었다.
그들에게 가난한 무명 화가 이안은 딸의 완벽한 인생에 낀 불순물,
혹은 잠시의 일탈일 뿐이었다.

"이안 씨, 우리 하윤이 옆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하윤의 아버지는 이안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 경멸이 섞인 눈으로 말했다.
그의 서재에 걸린 수억 원짜리 명화들은 마치 이안의 초라함을 비웃는 듯했다.

"하윤이는 곧 비엔나로 유학을 갑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예정되어 있고요.
그 아이의 길을 막지 마세요.
당신이 정말 하윤이를 사랑한다면,
그 아이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비수처럼 이안의 심장에 박혔다.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윤의 재능은 눈부셨고, 그녀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자신과 함께 이 좁고 낡은 작업실에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날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이안은 하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약속을 잊은 척했고, 그녀의 전화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림에만 몰두하는 척하며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다.
하윤은 상처받았고,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스러워했다.

"이안 씨, 우리 왜 이렇게 됐어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눈물을 글썽이며 묻는 그녀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이안은 일부러 캔버스로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지쳤어, 하윤 씨.
당신의 그 완벽한 세계, 나랑은 안 맞아.
당신 첼로 소리도 이제 시끄럽게만 들려."

거짓말이었다.
그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첼로 소리는 그의 영혼을 울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이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결국 하윤은 울면서 작업실을 뛰쳐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이안은 무너져 내렸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눈물처럼 번져나갔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그래서 보내야만 했다.
자신이 그녀의 길에 방해물이 될 것이기에.

시간이 흘렀다.
하윤은 비엔나로 떠났고,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녀의 소식을 신문과 잡지를 통해 접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세상 사람처럼 아득했다.

그는 하윤을 떠나보낸 고통을 캔버스에 쏟아부었다.
그의 그림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처절해졌다.
절망과 그리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사랑의 감정이 그의 붓 끝에서 폭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림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때 무명이었던 그는 이제 '고독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며 유명세를 얻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첫 개인전 오프닝 날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갤러리를 가득 메웠다.
축하 인사가 쏟아졌지만, 이안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이 모든 영광이 무슨 소용인가.
그가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이 곁에 없는데.

그때였다.
갤러리 입구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이안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윤이었다.
그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갤러리 중앙에 걸린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그 그림은 이안이 그녀를 떠나보낸 직후,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린 작품이었다.
제목은 'I Will Always Love You'.
잿빛 도시를 배경으로, 한 남자가 멀어져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온몸에서 사무치는 사랑과 슬픔이 느껴졌다.

하윤은 그림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한 듯했다.
그의 차가운 말들이 사실은 가장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그가 자신을 밀어낸 것이 그녀의 미래를 위한 가장 큰 희생이었음을.

이안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세상에는 오직 서로만이 존재했다.

"왔구나."

이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림... 봤어요. 당신의 진심을 이제야 알았어요. 바보같이..."

하윤이 눈물 젖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미안해.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어."

"아니요. 고마워요.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줘서."

그들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눈빛 속에 오갔다.
사랑, 그리움, 미안함, 그리고 체념.

하윤의 옆에는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이자, 그녀의 아버지가 선택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들의 세계는 여전히 달랐고,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함께할 수 없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 내일 다시 비엔나로 떠나요.
마지막 연주회가 끝나면 결혼할 거예요."

하윤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행복해야 해. 진심으로."

이안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림을 한번 더 돌아보고는, 약혼자의 팔짱을 끼고 갤러리를 나섰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그림 속 남자가 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And I... will always love you..."

사랑하지만, 나는 언제나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존재일 뿐.
그러니 나는 떠나야만 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내 모든 쓰라린 기억들도 함께 가져갈게.
그러니 제발, 울지 마.
우리 둘 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걸 알잖아.

나는 당신을 언제나 사랑할 거야. 영원히.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의 캔버스 위에서, 잿빛 도시의 마지막 왈츠가 서글프게 끝나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이제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터였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https://youtu.be/3JWTaaS7LdU?list=RD3JWTaaS7L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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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간 25.11.28 초겨울을 재촉하는 비처럼 시리면서도 절절한 이야기였어요. 이안이 보여준 사랑이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는 방식이라 속상했지만, 그 무게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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