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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컵의 마지막 블루스 (Sidcup's Last Blues)

작성자화랑|작성시간26.01.03|조회수96 목록 댓글 1

#락
#블루스

시드컵의 마지막 블루스 (Sidcup's Last Blues)

  •  

     

1946년 1월 3일, 잉글랜드 켄트주 시드컵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존 볼드윈.
훗날 세상이 존 폴 존스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될 아이였다.
그가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 세상은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겨우 보듬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스윙 재즈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도 어떻게든 춤을 추려 애썼다.
그 누구도 이 갓난아기의 작은 손가락이 훗날 거대한 망치가 되어 세상의 음악을 뒤흔들고, 수많은 젊음의 심장을 두들겨댈 운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여기 대한민국 서울의 한 낡은 LP 바.
레드 제플린은 나의 청춘을 사로잡아버린 최초의 영웅적인 밴드이기에, 그의 생일은 무척이나 감격스럽다.
1월 3일, 차가운 바람이 종로의 좁은 골목을 할퀴고 지나가는 밤.
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지하에 위치한 '블랙 독(Black Dog)'으로 내려왔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묵은 먼지와 위스키, 그리고 희미한 담배 연기 냄새. 이곳은 시간이 멈춘 섬과 같은 곳이었다.

"사장님, 여기 하이볼 한 잔이랑… 신청곡 괜찮을까요?"

카운터 너머에서 뿔테 안경을 쓴 채 묵묵히 잔을 닦던 중년의 사장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낡은 신청곡 용지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Led Zeppelin - The Rain Song'

내 청춘의 모든 감정이 이 한 곡에 담겨 있었다.
처음 이 곡을 들었던 열여섯 살의 가을, 낡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던 지미 페이지의 아련한 기타 아르페지오와 그 위를 유영하던 존 폴 존스의 멜로트론 소리는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잿빛이던 세상에 총천연색을 흩뿌리는 마법이었고,
평범한 일상에 서사를 부여하는 주문이었다.
사장님은 내 신청곡을 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수많은 LP판이 꽂힌 벽으로 다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앨범 하나를 꺼내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Houses of the Holy'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바늘이 소리골을 긁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공간은 신비로운 선율로 가득 찼다.

This is the springtime of my loving...

로버트 플랜트의 목소리가 흐르자, 나는 눈을 감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존 폴 존스의 생일이라는 감상 때문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저기… 혹시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한 남자가 내 앞의 빈 의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조금은 지쳐 보이지만 선한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바 안은 텅 비어 있었기에 굳이 내 앞에 앉으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나와 똑같이 하이볼을 주문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The Rain Song'을 들었다.
곡의 중반, 존 폴 존스의 베이스가 묵직하게 바닥을 기며 들어오는 부분에서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곡, 정말 오랜만에 듣네요."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제 인생의 곡이라고 할 수 있죠."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도요.
제 인생의 밴드, 인생의 곡입니다."

우리는 마치 오래된 암호를 확인한 비밀 요원들처럼 서로를 보며 웃었다.
레드 제플린이라는 공통분모는 처음 만난 이방인 사이의 벽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렸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도 하잖아요."

내가 운을 띄웠다.

"아시네요."

남자가 눈을 빛냈다.

"존 폴 존스의 생일.
1946년 1월 3일."

  •  

우리는 마치 축배를 들 듯 잔을 부딪쳤다.
그의 이름은 현준이라고 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오늘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이곳에 들어왔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였어요."

현준 씨가 말을 이었다.

"친구가 웬 해적판 테이프를 하나 줬는데, 그게 레드 제플린 4집이었죠.
'Black Dog'의 첫 리프를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구나.
그런데 정말 저를 사로잡은 건… 'Stairway to Heaven'도,
'Rock and Roll'도 아니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하이볼을 한 모금 마셨다.

"바로 'The Battle of Evermore'였어요.
그 곡에서 울려 퍼지는 만돌린 소리.
나중에 그게 존 폴 존스가 연주했다는 걸 알고는 정말 충격받았죠.
베이시스트가, 키보디스트가, 그렇게 아름다운 만돌린을 연주할 수 있다니.
그는 밴드의 뼈대이자 심장이었어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가 화려한 불꽃처럼 타오를 때,
존 보냄이 천둥처럼 울부짖을 때, 존 폴 존스는 그 모든 것을 품는 대지 같았죠."

현준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정확히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레드 제플린을 말할 때 보통 페이지와 플랜트를 떠올린다.
하지만 진정한 팬들은 안다.
존 폴 존스라는 거대한 뿌리가 없었다면,
레드 제플린이라는 거목은 결코 하늘 높이 뻗어 나갈 수 없었음을.
그의 베이스는 단순한 리듬 악기가 아니었다.
때로는 기타와 함께 포효하는 또 하나의 리프였고,
때로는 드럼과 함께 심장을 뛰게 하는 맥박이었으며,
때로는 모든 악기를 조화롭게 엮어내는 비단실이었다.

"저는 'No Quarter'를 들을 때마다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 축축하고 음산한 키보드 소리는 존 폴 존스가 아니면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세계죠.
그는 밴드에 신비감과 깊이를 더했어요.
단순한 하드록 밴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신화처럼 느껴지게 만든 장본인이죠."

우리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Kashmir'의 장엄함, 'Ramble On'의 서정성, 'Dazed and Confused'에서 보여준 광기 어린 연주까지.
마치 잊고 있던 보물 상자를 함께 열어보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레드 제플린의 세계를 탐험했다.

  •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으로 이어졌다.
현준 씨는 대학 시절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다고 했다.
물론 그의 영웅은 존 폴 존스였다.
그는 밴드 멤버들과 함께 'Communication Breakdown'을 연주하며 청춘의 열병을 앓았고, 첫사랑에게 차인 날에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Since I've Been Loving You'를 들으며 밤새 울었다고 했다.

"음악으로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어느새 베이스에는 먼지만 쌓여가고,
레드 제플린의 LP는 장식장이 되어버렸어요.
오늘 회사에서 부장에게 깨지고 터덜터덜 걷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 청춘의 영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을까."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묻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패기는 흐릿한 기억이 되었고, 가슴을 뛰게 하던 록 음악은 출퇴근길의 소음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우리는 영웅을 잃어버린 시대에 길을 잃은 소년들이었다.

  •  

그때, 바의 스피커에서 다음 곡이 흘러나왔다.
사장님의 선곡인 듯했다.

'Thank You'.

If the sun refused to shine, I would still be loving you.
When mountains crumble to the sea, there will still be you and me.

어쿠스틱 기타의 부드러운 선율과 오르간의 따스한 화음이 우리를 감쌌다. 로버트 플랜트의 목소리는 마치 잃어버린 것들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노래하는 듯했다.

"고맙네요."

현준 씨가 나지막이 말했다.

"…뭐가요?"

"이렇게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요.
혼자였다면 아마 한없이 우울해지다 집에 갔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 덕분에 잊고 있던 걸 떠올렸어요.
레드 제플린은 사라진 게 아니었어요.
제 마음속에,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있었던 거죠."

그의 말에 나는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우리는 영웅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잠시 잊고 살았을 뿐이다.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었다.
존 폴 존스가 1946년의 추운 겨울날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음악의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이 우리의 청춘을 지탱했고,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  

우리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요?"

현준 씨가 물었다.

"글쎄요. 아마 내년 1월 3일, 이곳에 오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그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주머니 속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꽂았다.
그리고 'The Rain Song'을 재생했다.

https://youtu.be/g8VduT7aR2c?list=RDg8VduT7aR2c

Led Zeppelin - The Rain Song (Official Audio)Listen to Led Zeppelin - "The Rain Song" from the album 'Houses of the Holy' (1973) https://LZ.lnk.to/HOTH► Listen to Mothership https://lnk.to/StreamMother...www.youtube.com


차가운 겨울밤의 공기 속으로, 지미 페이지의 기타와 존 폴 존스의 멜로트론이 다시 한번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열 여섯 살의 나를 떠올렸다.
세상을 향한 막연한 불안과 기대로 가득 찼던 소년.
그 소년에게 레드 제플린은 세상과 맞설 용기를 주는 갑옷이자,
꿈을 향해 나아갈 길을 비추는 등대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1월 3일이 되면 존 폴 존스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들으면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나 자신.

  •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의 영웅은 죽지 않았다.
그는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나의 남은 날들을 위한 블루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시드컵의 마지막 블루스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삶 속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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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명 | 작성시간 26.01.03 이런 밤에는 끈적한 블루스에 몸을 맡기고 하이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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