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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파, 그리고 여왕의 탄생
천서진의 생일을 맞이하여...
1978년 3월 28일.
서울 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욕망과 특권이 공기처럼 흐르는 그곳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훗날 청아재단의 실세이자, 대한민국을 뒤흔든 레전설 소프라노, 그리고 헤라팰리스의 여왕벌로 군림하게 될 천서진. 그녀의 탄생은 마치 거대한 오페라의 서곡처럼, 장엄하고도 불길한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수많은 막장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악녀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천서진은 그들과 궤를 달리했다. 그녀는 단순한 악녀가 아니었다. 질투와 욕망에 눈이 멀어 잠시 길을 잃은 가련한 영혼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뼛속까지, DNA 한 가닥까지 오만과 이기심, 그리고 지독한 자기애로 똘똘 뭉친,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의 결정체였다. 그녀의 악행은 너무나도 깊고 어두워, 차라리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실로 대단한 그랜드캐년 같은 존재. 결코 잊을 수 없는 팜므 파탈. 역대 최고의 악녀. 그녀는 전설이 되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녀의 광기를 가장 선명하게 각인시킨 장면이 있다. 바로 아버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굴러떨어져 죽어가는 것을 외면한 그날 밤.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그 순간,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공포, 죄책감, 환희, 해방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감정이 뒤섞여 폭발하는 듯한 연주. 그 곡이 바로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Mazeppa)’였다.
3월 28일, 자정.
헤라팰리스 85층, 천서진의 펜트하우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생일이었다. 하지만 축하의 말도, 화려한 파티도 없었다. 오직 적막만이 그녀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그녀는 실크 가운 차림으로 거실 중앙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옆에 둔 채, 그녀는 차갑게 식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제파.’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그 이름을 읊조렸다. 젊은 시절, 금지된 사랑에 빠졌다는 죄목으로 발가벗겨진 채 야생마의 등에 묶여 황야로 내쳐진 남자. 3일 밤낮을 말과 함께 달리며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었던 남자.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아, 결국 자신을 버린 세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영웅.
천서진은 피식 웃었다. 어리석은 남자. 왜 남의 것을 탐해 그런 고초를 겪는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졌어야지. 나처럼.
하지만 그녀는 마제파의 ‘고난’이 아닌, 그의 ‘부활’에 매료되었다. 황야를 질주하는 말의 광기 어린 발굽 소리, 살을 에는 바람 소리,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영웅의 포효. 그 모든 것이 리스트의 악보 안에,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 녹아 있었다.
“그래, 내 삶도 다르지 않았지.”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을 감도는 타닌의 씁쓸함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녀의 황야는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대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청아재단’이라는 이름의 왕국이었고, 그녀를 묶은 말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굴레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오윤희를 칭찬했다. 타고난 천재, 신이 내린 목소리. 그 말들은 날카로운 채찍이 되어 어린 서진의 등을 후려쳤다. 아버지는 그녀의 노력을, 그녀의 피나는 열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천서진은 그저 ‘2인자’일 뿐이었다. 청아예고 대상 트로피를 오윤희의 목에 걸어주려던 그 순간, 천서진은 마제파를 묶었던 말의 고삐를 스스로 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트로피로 오윤희의 목을 그어버린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황야를 향해 내달렸다. 피 맛을 본 야생마처럼.
건반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Allegro agitato molto*. 격렬하고 빠르게. 리스트가 묘사한 말발굽 소리, 그 쉼 없이 몰아치는 셋잇단음표가 그녀의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친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 위해 내달렸던 지난 세월의 광기 어린 질주였다.
한 음 한 음 건반을 누를 때마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윤철을 차지하기 위해 오윤희의 인생을 망가뜨렸던 순간. 청아재단 이사장이 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했던 그 비 오는 밤. 주단태의 손을 잡고 헤라팰리스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나날들. 딸 하은별을 서울대 음대에 보내기 위해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질렀던 기억들.
그녀의 연주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마치 아이언 메이든의 스티브 해리스가 베이스로 갤로핑 리듬을 연주하듯, 그녀의 왼손은 멈추지 않고 지옥의 리듬을 쪼개고 있었다. 리스트의 음악에 깃든 헤비메탈적인 광포함이 85층 펜트하우스를 가득 채웠다. 이것은 클래식이 아니었다. 이것은 천서진이라는 한 인간의 영혼이 내지르는 절규이자, 승리의 선언이었다.
곡의 중반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Andante* 부분이 나타났다. 황야에 쓰러져 죽어가던 마제파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희미한 희망을 품는 순간이다. 천서진의 연주도 잠시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딸, 하은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모든 욕망의 결정체이자, 유일한 아킬레스건. 은별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었다. 은별이 바로 그녀가 이 지옥 같은 황야에서 버텨내는 유일한 이유, 그녀의 밤하늘에 뜬 희미한 별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짧았다. 다시 몰아치는 *Allegro marziale*. 카자흐 병사들에게 구출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마제파의 부활. 천서진의 손가락은 다시 건반 위를 광적으로 오갔다. 그녀는 주단태를 떠올렸다. 자신과 닮았지만, 자신보다 더 지독했던 악마. 그와의 관계는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위험한 질주와도 같았다. 그를 짓밟고 일어서야만 했다. 마제파가 자신을 묶었던 백작에게 복수하듯, 천서진은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것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Born to lose, lived to win.”
레미 킬미스터의 철학처럼, 그녀는 애초에 패배자로 태어났을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2인자. 하지만 그녀는 결코 패배자로 살지 않았다. 이기기 위해 살았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했다.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금수저’가 되기 위해 싸웠다. 그녀의 방식은 추악하고 더러웠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마지막 코다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제파가 마침내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추대받는 장엄한 순간. 천서진의 연주는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더 이상 청아재단 이사장도, 소프라노도,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천서진’ 그 자체였다. 자신의 욕망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여왕. 그녀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D단조의 화음은 승리를 알리는 축포와도 같았다.
쾅!
마지막 옥타브 화음을 내리치며 연주가 끝났다.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땀과 눈물, 혹은 핏물이 뒤섞인 듯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옆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Happy birthday, to me.”
스스로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타인의 인정이나 축하를 갈구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자신의 신이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 아래, 수많은 인간들이 각자의 욕망을 품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만큼 뜨겁게, 자신만큼 치열하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지쳐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제파처럼 황야에 버려졌고,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그녀의 삶은 리스트의 교향시처럼 ‘암흑에서 광명’으로, ‘고난에서 승리’로 나아갔다. 물론, 그녀가 맞이한 광명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암흑이었고, 그녀의 승리는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법이다.
3월 28일, 여왕의 생일.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탄생을, 그리고 자신의 승리를 확인했다.
그녀의 광기 어린 피아노 연주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막 새로운 악장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전설은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https://youtu.be/CH8h__be0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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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chan Lim 임윤찬 – LISZT – 12 Transcendental Etudes No. 4 (Mazeppa)Watch the full recording of all 12 Transcendental Etudes: https://youtu.be/KsGLmrR0BVsLearn More about The Cliburn: https://cliburn.org/Semifinal Round Recit...www.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