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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비가 내리는 계단

작성자화랑|작성시간26.06.13|조회수28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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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비가 내리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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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복도 특유의 소독약 냄새는 언제나 사람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42세의 여의사, 사람들에게는 'Dr. Stein'이라는 필명으로 더 익숙한 다혜는 어머니의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뿌연 하늘이 보였고, 병실 안은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항암 치료의 독한 기운 때문인지, 한때 누구보다 활기찼던 어머니의 얼굴은 이제 마른 낙엽처럼 창백했다. 다혜는 어머니의 야윈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다혜가 아주 어릴 적,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릴 때나 꾹꾹 눌러 쓴 일기장을 넘길 때 늘 곁에 있어 주던 손이었다.

"주님, 사랑하는 제 어머니를 보호하여 주시고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하게 하소서"

다혜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종교가 삶의 전부인 적은 없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 서자 절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낡은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지금의 그녀는 헬로윈(Helloween)의 질주하는 투윈 기타 사운드와 스키드 로우(Skid Row)의 세바스찬 바흐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고음에 열광하는 헤비메탈 마니아지만, 그녀의 음악적 뿌리는 훨씬 더 깊고 순수한 곳에 닿아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테이프는 80년대 초반, 어머니가 직접 녹음해 주었던 동요와 당시의 팝송들이 섞인 조잡한 편집본이었다. 다혜는 한쪽 이어폰을 어머니의 귀에 살며시 꽂아주고, 다른 한쪽을 자신의 귀에 걸었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30여 년 전의 시간이 병실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테이프에서 처음 흘러나온 곡은 '클레멘타인'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동요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기타를 배우며 서툴게 연주하고 다혜가 그 옆에서 옹알이하듯 따라 부르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다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0대 이전의 다혜에게 음악은 '공기'였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라디오에서는 아바(ABBA)의 'Dancing Queen'이 흘러나왔고, 텔레비전에서는 만화 영화 주제곡들이 아이들의 세상을 지배했다.

다혜는 기억한다. 대여섯 살 무렵, 거실 한복판에서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를 부르며 소파 위를 뛰어다니던 자신을. 그때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 찬거리를 다듬으며 다혜의 박자에 맞춰 칼질 소리를 내주곤 했다.

"엄마, 나중에 커서 철이처럼 우주 기차 탈 거야!"

"그래, 우리 다혜는 용감하니까 안드로메다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그 시절의 음악은 희망이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알기 전, 멜로디는 그저 몸을 흔들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신호였다. 다혜는 회상에 젖었다. 10대 사춘기가 찾아와 헬로윈의 'Eagle Fly Free'를 들으며 자유를 갈망하고, 스키드 로우의 'I Remember You'를 들으며 첫사랑의 열병을 앓기 전, 그녀의 영혼을 채웠던 것은 어머니의 콧노래와 낡은 전축에서 나오던 클래식 소품곡들이었다.

특히 쇼팽의 '강아지 왈츠'는 다혜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었다. 어머니는 피아노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딸을 위해 매일 저녁 그 곡을 연주해 주었다. 건반 위를 구르는 듯한 가벼운 음표들은 어린 다혜에게 마치 은빛 비가 내리는 계단을 오르는 듯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회상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소리에 깨졌다. 어머니가 짧은 기침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다혜는 얼른 물수건을 적셔 어머니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다혜야... 음악 소리가 들리는구나."

어머니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엄마. 예전에 엄마가 나한테 녹음해 줬던 테이프야. 기억나? 나 여기서 엄청 음치처럼 노래 부르잖아."

어머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경련 같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과거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안간힘에 가까웠다. 1년 전, 어머니가 췌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 다혜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강인하고 언제나 밝았던 어머니는 항암 치료가 반복될수록 말수가 적어졌고, 집안을 가득 채우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다혜는 괴로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메탈 음악처럼 강하게 버티고 싶었지만, 현실은 스키드 로우의 슬픈 발라드보다 더 처절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다시 기쁨이 깃들기를 간절히 원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예전처럼 크게 웃으며 "우리 딸, 노래 참 잘하네"라고 말해주던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혜는 워크맨의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테이프는 어느덧 어머니가 좋아하던 올드 팝, 카펜터스(The 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로 넘어가고 있었다.

*When I was young I'd listen to the radio, waiting for my favorite songs...*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는 노래를 기다리며 라디오를 듣곤 했지...)

가사가 병실 안에 잔잔히 퍼졌다. 다혜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가사를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42세의 유부녀, 아이의 엄마, 그리고 누군가의 아내라는 직함들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엄마의 어린 딸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감겨 있던 어머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어머니가 손가락 끝으로 다혜의 손등을 톡톡 쳤다. 박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아주 느리고 힘겨운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리듬이었다.

"엄마...?"

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갈라진 목소리로 노래의 뒷부분을 아주 작게 읊조렸다.

"Sha-la-la-la... Every wo-o-ah-as still shines..."

다혜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고통의 장벽을 뚫고 어머니의 영혼에 닿았다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10대 이전, 음악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 순수한 시절의 기억이 암세포로 가득 찬 육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다혜는 병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들어오며 커튼을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작은 선율이 어머니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하게 하소서. 비록 예전처럼 큰 소리로 웃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의 영혼이 평안의 멜로디 속에서 춤추게 하소서.'

다혜는 이제 안다. 자신이 왜 헬로윈의 파워풀한 음악에 매료되었는지, 왜 스키드 로우의 거친 감성에 열광했는지. 그것은 모두 삶의 에너지를 갈구하는 몸짓이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근원은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따뜻한 동요와 팝송들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다혜는 워크맨을 끄지 않았다. 테이프는 계속해서 돌아가며, 80년대의 어느 화창한 오후, 햇살이 가득 들어오던 거실의 풍경을 병실 안으로 계속해서 불러오고 있었다.

"엄마, 내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헬로윈 노래도 들려줄게. 아주 신나는 곡으로. 그러니까 힘내야 해. 알았지?"

다혜는 어머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42세의 Dr. Stein은 오늘, 음악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었다. 병실의 어둠 속에서도, 은빛 비가 내리는 계단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https://youtu.be/YTaWayUE5XA?list=RDYTaWayUE5XA

The Carpenters - Yesterday Once More (INCLUDES LYRICS)Montage of images along with the classic song "Yesterday Once More"...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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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Foxic | 작성시간 26.06.13 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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