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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의 멜로디, 그리고 재기의 서곡
창밖으로 눅눅한 여름의 초입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6월 13일, 유다에게는 그저 또 다른 절망의 하루일 뿐이었다. 한때 강남의 펜트하우스에서 일어나 창밖의 도시를 제 발아래 풍경처럼 굽어보던 그는, 이제 손바닥만 한 고시원 창문으로 옆 건물의 시커먼 벽만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대한 회사, 명예, 그리고 사람까지. 친동생처럼 믿었던 요섭의 배신은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달콤한 말로 접근해 그의 인감과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요섭은 하루아침에 유다의 전 재산을 삼키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빚더미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는 비웃음뿐이었다.
“한수 씨, 또 천장만 보고 있어요?”
문을 빼꼼히 연 것은 고시원 총무 지연이었다. 유다는 이곳에서 ‘한수’라는 가명을 썼다. ‘유다’라는 이름은 이제 그에게 배신자의 낙인이자, 스스로를 향한 조롱과도 같았다. 지연은 컵라면 두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도 오고 그래서. 오늘은 제가 쏩니다. 특식이에요, 특식.”
지연은 이 잿빛 고시원의 유일한 색채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동그란 눈, 언제나 생기가 넘치는 그녀는 우울의 늪에 빠진 유다를 건져 올려 주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녀는 유다의 과거를 몰랐다. 그저 말이 없고, 어딘가 슬픈 눈을 한, 세상과 담쌓고 사는 고시원 장기 투숙객 정도로만 알 뿐이었다.
좁은 방에 마주 앉아 컵라면을 먹는 풍경은 처량했지만, 지연과 함께라면 견딜 만했다. 후루룩, 면발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던 그때, 지연의 휴대폰에서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아, 오늘 제 플레이리스트 테마는 ‘6월 13일의 음악사’예요. 이거 들어봐요. 애틀랜틱 스타의 ‘Always’라는 곡인데, 1987년 오늘, 빌보드 1위를 했대요.”
감미로운 멜로디가 눅눅한 공기를 채웠다. 유다는 무심코 흥얼거렸다.
“Girl, you are to me, all that a woman should be…”
지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한수 씨, 이 노래 알아요? 되게 옛날 노랜데.”
“어릴 때 아버지 차에서 자주 들었죠.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요. 언제나, 영원히… 뭐 그런 가사들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유다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영원’을 약속했던 아버지의 회사는 이제 남의 손에 넘어갔고, ‘언제나’ 함께할 거라 믿었던 요섭은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
지연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휴대폰을 조작하며 말했다. “오늘 음악사에 재밌는 게 많아요. 1970년 오늘은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랑 마지막 싱글이 동시에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했대요. ‘Let It Be’랑 ‘The Long and Winding Road’. 위대한 밴드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거죠.”
“The long and winding road… 길고 구불구불한 길이로군. 내 인생처럼.” 유다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왜 그래요. 그 길이 결국엔 당신의 문으로 날 이끌 거라고 노래하잖아요. 희망적인 노래라구요. 그리고 또! 1995년 오늘, 앨라니스 모리셋의 데뷔 앨범이 나왔어요. ‘Jagged Little Pill’. 이 앨범은 진짜 혁명이었죠. 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다 해줬거든요. 특히 ‘You Oughta Know’는 배신한 전 남친한테 보내는 통쾌한 복수극 같은 노래예요.”
지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노래의 한 구절을 흉내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유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웃음. 그가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지어 보인 진짜 웃음이었다.
“웃었다! 드디어 웃었네.” 지연이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요. 맨날 인상만 쓰고 있지 말고.”
“고마워요, 지연 씨 덕분에.”
“고마우면 라면 값 내든가.” 지연이 눙을 쳤다. “아, 그리고 제일 드라마틱한 사건은 2005년 오늘이에요.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해 전부 무죄 평결을 받은 날. 온 세상이 그를 괴물 취급했는데, 결국 법정에서 결백이 증명된 거죠. 끈질긴 오해와 비난 속에서 자신을 지켜낸 거예요.”
유다는 국물까지 비운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으며 지연의 말을 곱씹었다. 위대한 밴드의 마지막, 통쾌한 복수의 시작, 그리고 세상의 오해를 이겨낸 결백의 증명. 6월 13일이라는 하루에 담긴 음악의 역사들이 마치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압축해 놓은 듯했다.
“한수 씨는…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지연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유다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이 작은 여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유다’라는 것부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사를 요섭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지연은 분노로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그 요섭이라는 사람, 진짜 나쁜 놈이네요! 아니, 악마지, 악마!”
“내가 바보였던 거죠.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으니까.”
“아니에요!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한 게 왜 한수 씨, 아니 유다 씨 잘못이에요! 그건 그놈이 쓰레기인 거지!”
지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서성였다. 그녀는 고시원 총무가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유다를 쏘아보았다.
“유다 씨, 전공이 뭐였어요?”
“전공이요? 철학… 이었습니다.”
“철학이요? 아… 어쩐지. 그럼 회사 경영은 전혀 몰랐겠네요?”
“네. 아버지는 제가 경영보다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리더가 되길 바라셨죠. 실무는 요섭처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고… 그게 아버지의 지론이셨어요.”
“하… 아버님도 너무 이상적이셨네.”
지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눈을 빛냈다.
“저는 경영학과를 나왔어요. 그것도 꽤 좋은 성적으로.”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날카롭고 지적인 빛이 번뜩였다.
“회사를 되찾고 싶어요?”
유다는 지연의 돌발적인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되찾고 싶지 않을 리가. 매일 밤 꿈속에서 요섭의 멱살을 잡고 절규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법적으로 모든 것은 요섭의 소유였고, 유다는 빈털터리였다.
“방법이… 없어요. 변호사들도 다들 고개를 저었습니다.”
“방법이 왜 없어요?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어요. 그 요섭이라는 사람이 유다 씨 재산을 빼돌릴 때, 분명 어딘가에 허점을 남겼을 거예요. 법의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갔겠지만,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비정상적인 흐름이 있었을 거라고요.”
지연은 유다의 책상 앞에 놓인 유일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귀엽고 깜찍한 고시원 총무의 것이 아니었다. 냉철한 분석가의 목소리였다.
“우선, 그 회사의 이름이 뭐죠? 그리고 요섭이 유다 씨의 재산을 어떤 방식으로 이전했는지, 최대한 자세하게 말해줘요. 주식 양도였나요? 아니면 자산 매각 후 현금화? 계약서의 모든 조항, 사소한 특약까지 전부 다요.”
유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가 쏟아내는 전문 용어들을 들었다. 그는 지연의 기세에 압도되어, 기억을 더듬어 요섭과의 마지막 계약 과정을 힘겹게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억하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지연은 이면지에 빠른 속도로 적으며 구조도를 그렸다.
“지분 100%를 시가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양도하는 계약서에 직접 날인했다… 위임장도 써줬고요. 변호사 말로는 제가 직접 동의한 이상, 사기죄 입증이 거의 불가능하대요.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할 수도 없고요.”
“멍청하긴.”
지연이 혀를 찼다.
“하지만 괜찮아요. 정공법이 안 되면 우회해야죠. 그 계약이 법적으로 유효하다면, 우리는 그 계약의 ‘결과’를 공격해야 해요.”
“결과라면요?”
“요섭이 회사를 인수한 후, 분명 비정상적인 자금 흐름을 만들었을 거예요.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손에 쥔 사람들은 그걸 어딘가에 숨기거나, 다른 형태로 바꾸려고 하거든요. 자금 세탁, 혹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해외 유출 같은 거요. 우리는 그 꼬리를 잡는 거예요. 횡령이나 배임 같은 별도의 범죄 혐의를 찾아내는 거죠.”
지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달라져요. 사기 사건은 유다 씨와 요섭, 두 사람의 문제지만, 횡령이나 배임은 회사 전체, 그리고 다른 주주나 채권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범죄거든요. 검찰이 움직일 명분이 생기는 거죠. 여론도 유다 씨 편이 될 거고요. ‘경영 능력 없는 철부지’가 아니라, ‘믿었던 심복에게 배신당한 비운의 경영자’로 프레임이 바뀌는 순간, 게임은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유다는 숨을 죽인 채 지연을 바라보았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그에게, 지연은 ‘The Long and Winding Road’의 노랫말처럼 한 줄기 빛이 되어 그의 문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싸워줄 전사였다.
“어때요? 한번 해볼래요?”
지연이 유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앨라니스 모리셋처럼, 우리도 통쾌한 복수극 한번 찍어보자고요. 유다 씨의 ‘Jagged Little Pill’ 앨범을 만드는 거예요.”
유다는 지연이 내민 작지만 단단한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을 잡으면, 길고 구불구불했던 절망의 길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지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이, 눅눅한 고시원 방 안에서 라면 냄새와 함께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네. 해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창밖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6월 13일, 한때는 절망의 날이었던 오늘이, 이제는 재기와 복수의 서곡이 시작된 날로 기억될 것이었다. 유다의 새로운 플레이리스트 첫 곡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https://youtu.be/NPcyTyilmYY?list=RDNPcyTyilmYY&t=1
Alanis Morissette - You Oughta Know (Official 4K Music Video)You Oughta Know from the album “Jagged Little Pill” Jagged Little...www.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