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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건즈(Big Guns): 지하철의 발레리나와 불꽃의 왈츠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서울의 지하철 2호선은 비릿한 쇠 냄새와 피로에 찌든 인간들의 날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덜컹거리는 전동차 한구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금속성 공기를 가르며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존재 같았다. 붐비는 차내에서도 그녀 주위로만 투명한 막이 형성된 듯 공간이 일렁였다. 꽉 끼는 검은색 민소매 상의 위로 흘러내린 짙은 갈색 머리칼, 그리고 그 사이로 살짝 비치는 투명한 피부. 그녀는 지하철 안의 발레리나였다. 하지만 우아함보다는 서늘한 날이 선 분위기를 풍겼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녀의 발끝에는 우아한 토슈즈 대신, 바닥을 찍을 때마다 '또각' 소리를 내며 불꽃을 튈 것 같은 아찔한 스틸레토 힐이 신겨져 있었다.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빨간색과 흰색이 소용돌이치는 지팡이 사탕(Candy Cane)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역 벽면에 붙은 무심한 광고문의 일련번호처럼 차갑고도 명확한 존재감을 뽐내며, 누군가의 사교적인 호출을 급히 따르는 중인 듯 보였다.
나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거다."
내 안의 본능이 속삭였다. 나는 내가 마치 수류탄을 든 발렌티노(Valentino)라도 된 양,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사진 속 모습처럼 나른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갈색이었다. 나는 내 안의 리비도를 동력 삼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것은 유혹이 아니었다. 폭탄 투하의 전조였다.
그녀는 '빅 건즈(Big Guns)'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화기가 아니었다. 나를 꿰뚫는 그녀의 시선, 나른하게 입술 근처에 가져다 댄 손가락, 그리고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 그 자체였다. 그녀가 내 마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나는 마치 총살형 집행 소대 앞에 선 죄수처럼 무력해졌다.
"Bang, bang!"
귀 가를 때리는 환청과 함께 내 이성은 산산조각 났다. 그녀의 존재는 나를 통째로 날려버렸고,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불길 속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수천 명의 남자를 태워버린 듯한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녀를 놓치고 며칠 뒤, 나는 멍한 정신으로 신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롤러스케이트를 탄 괴상한 노상 전도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낡은 성경책을 흔들며 외쳤다.
"형제여, 내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있소!"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그 열쇠는 나중에 영화로 나오면 볼 테니까 넣어두세요. 난 이미 그 천국에 가봤거든요. 근데 거기가 사실은 지옥이더라고요."
그 짧은 만남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호감은 작은 전투에 불과하지만, 사랑은 전면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전쟁터에서 나는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적진에 뛰어든 멍청한 병사였다.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압구정의 어느 지하 바(Bar)였다. 그녀는 사진 속 모습 그대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른한 표정으로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검은색 옷감 위에 흩뿌려져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내 사랑을 하늘 끝까지 끌어올렸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빅 건즈'는 여전히 내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아직도 안 죽었네?"
그녀가 입술을 떼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으며, 마치 달콤한 독약 같았다.
"당신이 쏜 총알이 너무 뜨거워서, 죽는 대신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죠."
그녀는 내 대답이 흥미롭다는 듯, 사진 속에서처럼 검지 손가락을 입술 끝에 갖다 댔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내 심장은 다시 한번 벌집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놀라게 하는 법을 알았고, 나를 파괴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제 그녀의 차 뒷좌석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 '백시트 로미오(Back seat Romeo)'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운전석에서 거칠게 핸들을 꺾을 때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들고 혼자만의 카드 게임(Solitaire)을 하듯 의미 없는 상상을 이어갔다.
밤은 깊어가고, 나에게는 더 이상 내세울 자존심도, 그녀의 마음을 뚫을 수 있는 총알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는 것조차 나에게는 구원이었으니까.
그녀는 다시 한번 내 심장을 겨누었다.
"Bang, bang!"
소대원들이 일제히 발사하는 총성처럼 그녀의 웃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다시 화염 속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진정으로 거대한 화력을 가진 여자였다. 단순히 외모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파괴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하철역 벽면의 번호처럼 차가웠던 그녀, 스틸레토 힐로 내 가슴을 짓밟고 캔디 케인처럼 달콤한 고통을 주던 그녀. 나는 그녀의 '빅 건즈'에 맞아 비틀거리면서도 그녀의 발치를 떠나지 못했다.
"나를 정말 죽일 건가요?"
내가 묻자, 그녀는 사진 속 그 몽환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아니, 넌 이미 죽었어. 내 불꽃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중이지."
그녀는 정말로 거대한 총을 가졌다. 그녀는 나를 쏘았고, 나는 불길 속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추락은 세상 그 어떤 비행보다 황홀했다. 검은 민소매 위로 비치던 그녀의 하얀 살결과, 나를 조롱하던 그 깊은 갈색 눈동자.
나는 오늘도 그녀라는 전장에서 패배한 포로가 되어, 그녀가 쏘아 올린 불꽃놀이를 감상하며 기꺼이 타 죽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정말, 정말로 거대한 총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기쁘게 그 총구 앞에 심장을 내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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