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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의 플레이리스트
낡은 LP판이 턴테이블 위에서 느릿하게 돌았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낭만적인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에롤 가너(Erroll Garner)의 연주였다. 니키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했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방 안을 채운 것은 스탠드의 은은한 조명과 피아노 소리뿐이었다.
“1921년 오늘,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천재 재즈 피아니스트. 정식으로 악보 읽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도 저런 연주를 했다니, 믿어져?”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메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따뜻한 코코아 잔을 감싸 쥔 채 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눈을 떴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건 그런 거겠지. 악보라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 연주가 가능했을지도 몰라.”
“당신처럼?”
메리의 말에 니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니키는 ‘닥터 엑스’라 불리는 정계 거물의 비밀 요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법의 심판을 교묘히 피해 가는 부패한 권력자들을 어둠 속에서 처리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그를 ‘사냥개’라 불렀지만, 니키는 스스로를 ‘규칙 밖의 정의를 실현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법이라는 정형화된 악보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라는 즉흥 연주를 펼치는 연주가. 에롤 가너의 자유로운 선율은 그래서 늘 니키의 마음을 울렸다.
메리는 닥터 엑스의 지령을 니키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업무 관계였지만, 임무의 무게를 짊어진 니키의 고독한 눈빛과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메리의 따뜻한 시선은 어느새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함께 있는 이 짧은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위험과 어둠을 잊고 평범한 연인이 되었다. 이 아늑한 은신처는 그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무대였다.
“다음 곡은 뭘로 할까? 1941년 오늘 태어난 해리 닐슨(Harry Nilsson)은 어때? ‘Without You’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리지.”
메리가 LP판이 담긴 상자를 뒤적이며 말했다.
“아니, 오늘은 좀 더 경쾌한 게 좋겠어. 1949년생,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러셀 히치콕(Russell Hitchcock)은 어때? 그의 시원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
니키의 말에 메리는 웃으며 ‘Lost in Love’가 담긴 앨범을 꺼내 들었다. 음악이 바뀌자 방 안의 분위기도 한결 가벼워졌다. 니키는 메리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메리는 니키의 품에 편안하게 기댔다. 러셀 히치콕의 청량한 미성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두 사람의 마음에도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오늘은 유난히 음악가들이 많이 태어났네. 1951년에는 밴드 캔사스(Kansas)의 스티브 월시(Steve Walsh)가, 1976년에는 스노우 패트롤(Snow Patrol)의 게리 라이트바디(Gary Lightbody)가 태어났고, 1986년에는 이매진 드래곤스(Imagine Dragons)의 기타리스트 다니엘 웨인 서몬(Daniel Wayne Sermon)도 태어났어.”
메리가 스마트폰으로 ‘6월 15일의 음악사’를 검색하며 줄줄 읊었다.
“거물급 밴드들이 많군. 마치 오늘 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처럼.”
니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메리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녀는 니키의 손을 꼭 잡았다.
“무서워?”
니키가 물었다.
“당신이 다칠까 봐. 늘 무서워.”
“걱정 마. 나는 프로니까.”
니키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역시 다가올 임무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닥터 엑스의 명령은 언제나 칼날처럼 날카롭고 위험했다. 하지만 그는 메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스피커에서 낯선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경쾌한 곡이었다.
“이 노래는 뭐지?”
니키가 물었다.
“아, 사카모토 큐(Sakamoto Kyu)의 ‘스키야키(Sukiyaki)’. 1963년 오늘, 아시아 가수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곡이야. 3주 동안이나 정상을 지켰대. 원래 제목은 ‘위를 보고 걷자’인데, 미국에 발매되면서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일본 음식 이름인 ‘스키야키’로 바뀌었다고 해.”
메리의 설명에 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를 보고 걷자…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가사 뜻이 좋네. 낯선 땅에서, 전혀 다른 언어로 된 노래가 1위를 했다는 게 놀라워. 음악에는 정말 국경이 없나 봐.”
“그렇지? 하지만 슬픈 사연도 있어. 이 노래를 부른 사카모토 큐는 나중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든.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어.”
“안타깝네. 마치 1968년 오늘,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처럼. 재능 있는 사람들은 왜 이리 일찍 우리 곁을 떠나는 걸까.”
니키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잠겨들었다. 그는 짧고 굵게 타오르다 사라지는 불꽃 같은 예술가들의 삶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신의 삶 역시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과 같았다.
두 사람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메리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것은 ‘X’라는 이니셜뿐이었다. 닥터 엑스의 연락이었다. 메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니키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낭만적인 음악 감상은 끝났다. 사냥의 시간이었다.
메리는 심호흡 한번 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암호화된 메시지에는 오늘 밤의 타겟과 임무 내용이 간략하게 담겨 있었다.
[타겟: 유성그룹 회장, 장태준. 위치: 강남 VVIP 클럽 ‘오딘’. 임무: 장 회장의 비밀 금고에서 ‘블루 다이아몬드’ 관련 비리 장부 확보 및 처리. 흔적을 남기지 말 것.]
장태준. 언론에서는 성공한 사업가로 포장되어 있지만, 뒤로는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정재계를 주무르는 악인이었다. 최근에는 해외에서 밀수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닥터 엑스는 그 고리를 끊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장태준 회장이군. 만만치 않은 상대야.”
니키가 파일 내용을 훑어보며 말했다. 클럽 ‘오딘’은 철통같은 보안으로 유명했다. 내부 구조와 경호 시스템을 파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에도 위험할 거야. 경호원들이 스무 명은 넘을 거고, 클럽 전체에 CCTV가 깔려 있어.”
메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CCTV는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이고, 경호원들은… 사람이 하는 일엔 언제나 빈틈이 있지.”
니키는 담담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 한쪽에 있는 옷장으로 다가가 검은색 특수 활동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니키의 모습은 조금 전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던 낭만적인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다부진 몸,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철한 기운은 영락없는 ‘어둠 속의 사냥개’였다.
메리는 그런 니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니키의 허리에 특수 제작된 와이어 건과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채워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익숙했다.
“이 음악이 흐를 동안만이라도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메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스피커에서는 1981년 오늘 발매된 듀란 듀란(Duran Duran)의 데뷔 앨범 수록곡이 흐르고 있었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신스팝 사운드가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돌아오면, 이 앨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듣자. 약속해.”
니키는 메리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약속할게.”
그때, 니키의 눈에 메리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이 들어왔다. 1969년 오늘, LA에서 태어난 갱스터 랩의 선구자, 아이스 큐브(Ice Cube)의 사진이 떠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거침없는 분노를 랩으로 쏟아냈던 그의 음악. 니키는 피식 웃었다.
“오늘 밤 내 임무의 배경음악은 저걸로 해야겠군. 아이스 큐브. 이름 한번 마음에 드네.”
“제발… 농담할 기분 아니야.”
메리가 울먹였다. 니키는 그런 메리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미안해.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위를 보고 걷는’ 남자잖아.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아.”
니키는 사카모토 큐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메리를 안심시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화려한 불빛 아래, 얼마나 많은 추악한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까.
“다녀올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니키는 창문을 열었다. 한 줄기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마치 한 마리의 검은 표범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혼자 남은 방. 메리는 니키가 사라진 창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어느새 폴라 압둘(Paula Abdul)의 ‘Rush Rush’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991년 오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라 5주간 머물렀던 감미로운 사랑 노래였다. 하지만 지금 메리의 귀에는 그 어떤 멜로디도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불안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니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하는 것 외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LP판이 모두 돌아가고 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메리는 문득 스마트폰을 들어 마지막으로 검색했던 페이지를 열었다.
[1996년 6월 15일,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사망.]
빌리 홀리데이, 사라 본과 함께 3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로 불렸던 위대한 가수. 그녀의 죽음은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메리는 그녀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복과 위로를 주었던 그녀의 찬란했던 삶. 그 삶의 마지막 페이지가 오늘, 6월 15일이었다.
탄생과 죽음, 성공과 비극, 환희와 슬픔이 교차하는 하루. 메리는 오늘따라 ‘6월 15일의 음악사’가 마치 니키와 자신의 삶을 요약해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니키의 삶은 화려했지만 동시에 위태로웠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자신의 사랑 또한 애틋하지만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익숙한 그림자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니키였다. 그의 옷은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뺨에는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살아 빛나고 있었다.
“메리.”
니키의 목소리에 메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니키.”
“약속은 지켜야지. 듀란 듀란 앨범, 같이 듣기로 했잖아.”
니키는 메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손에는 작은 USB 메모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장태준 회장의 모든 비리가 담긴 ‘블루 다이아몬드’ 장부였다. 임무는 성공이었다.
니키는 메리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턴테이블로 다가가 듀란 듀란의 LP판을 다시 올렸다. 경쾌한 전주가 흐르자, 두 사람을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서서히 걷히는 듯했다.
“이제 다 끝났어?”
메리가 물었다.
“아니, 이제 시작일지도 몰라. 닥터 엑스는 이 자료를 이용해 더 큰 그림을 그리겠지.”
니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의 임무가 끝나면 또 다른 임무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니키는 메리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온기는 메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메리, 언젠가 이 모든 게 끝나면… 우리, 피츠버그에 가볼까? 에롤 가너가 태어난 곳. 거기서 재즈 클럽에 가서 그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는 거야.”
“좋아. 그리고 호주 멜버른에도 가자. 러셀 히치콕의 고향에서 에어 서플라이 노래를 들으며 바닷가를 걷는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비록 내일의 삶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현실 속에 있지만, 그들은 함께 꿈을 꾸었다. 음악과 함께, 사랑과 함께.
창밖의 어둠은 여전히 깊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작은 방 안에는 희망의 멜로디가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6월 15일의 플레이리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새로운 트랙을 시작하고 있었다.
https://youtu.be/_UIn3lufcZ0?list=RD_UIn3lufc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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