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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홀의 스키드로우 (Skid Row)

작성자화랑|작성시간26.06.21|조회수44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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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홀의 스키드로우 (Skid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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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는 계절을 가늠할 수 없는 미지근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남의 한 조용한 카페,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우산 색깔이 무채색의 거리 위에서 유일하게 생동감을 띠고 있었다. 나는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점잖은 감색 슈트. 40년이라는 세월은 청년의 날카로움을 깎아내고 그 자리에 중년의 완숙함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만큼은 내가 기억하는 20대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선배, 진짜 그대로시네요.”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나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대로긴, 벌써 환갑이 내일모레인데.
자네야말로 성공한 사업가 포스가 철철 넘치는구먼.”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변한 모습과 변하지 않은 모습들을 퍼즐 맞추듯 대조하며 웃음을 나눴다. 그러다 문득,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저, 대학 시절에 선배랑 제일 친했다고 생각했어요.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 그래?”

나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사실 내 기억 속의 80년대 중반은 최루탄 가스와 눅눅한 막걸리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갈등의 연속이었다. 누군가와 ‘제일 친했다’는 확신을 갖기엔 너무나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그럼요. 수업은 빼먹어도 써클룸은 꼭 나갔거든요. 선배 보러요.”

“허허, 나를 보러? 내가 뭐 볼 게 있다고.”

“써클룸 문을 열면요, 항상 선배가 거기 있었어요. 통기타 하나 메고, 아니면 카세트 데크 옆에서 목청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죠.”

“아, 그래? 그때 난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민중가요? 아니면 들국화?”

나는 당연히 그 시절 우리를 지배했던 서정적인 포크나 저항의 노래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선배는 항상 스키드로우(Skid Row)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아, 그래?”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스키드로우라니. 세바스찬 바흐의 그 찢어지는 듯한 고음과 반항적인 가죽 자켓이 상징인 그 헤비메탈 밴드 말인가.

“네. 매번 갈 때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고 계셨거든요? 어떤 날은 좀 슬픈 노래 같고, 어떤 날은 세상 다 부술 것처럼 소리를 지르시고…. 근데 나중에 제가 음반 가게 가서 찾아보니까, 그게 다 스키드로우 노래더라고요. ㅋㅋㅋ”

“아… 그랬구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40년 전의 기억이 마치 흑백 필름에 색이 입혀지듯 선명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89년, 서울의 한 대학교 동아리방. 곰팡이 냄새와 담배 연기가 찌든 그 좁은 공간은 나의 해방구였다. 당시 나는 법대생이었지만, 법전보다는 일렉 기타의 디스토션 사운드에 더 미쳐 있었다. 세상은 민주화를 외치며 요동치고 있었고, 친구들은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하지만 나는 겁쟁이였거나, 혹은 지독한 개인주의자였다. 나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기보다 내 안의 끓어오르는 정체 모를 분노를 배설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내 귀를 강타한 것이 바로 스키드로우의 데뷔 앨범이었다.

“I remember you...”

사랑 노래인 줄 알았는데, 세바스찬 바흐의 목소리에는 처절한 절규가 담겨 있었다. 나는 써클룸의 낡은 앰프에 기타를 꽂고, 혹은 기타가 없을 땐 빗자루라도 휘두르며 그들의 노래를 카피했다.

‘Youth Gone Wild’를 부를 때는 마치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가가 된 기분이었다. ‘18 and Life’를 부를 때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청춘의 비극에 감정 이입을 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후배 녀석은 문가에 앉아 그런 나를 묵묵히 지켜보곤 했다. 나는 그가 내 노래를 감상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갈 곳 없는 복학생 형의 소음 공해를 견뎌주는 착한 후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는 그 소음 속에서 나의 ‘스키드로우’를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 기억나세요? ‘I Remember You’ 부르다가 고음 안 올라가서 삑사리 나면, 혼자 민망해서 ‘아, 어제 술을 너무 마셨네’ 하고 변명하시던 거.”

“야, 너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 창피하게.”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4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때 선배는 정말 자유로워 보였어요. 다들 취업 걱정, 시국 걱정에 얼굴이 어두웠는데, 선배만은 그 좁은 써클룸에서 스키드로우의 노래를 부르며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전 그게 부러웠나 봐요.”

후배의 말에 나는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나는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치열하게 도망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압박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그리고 그 도망의 끝에서 만난 것이 스키드로우의 거친 멜로디였다.

“자네, 지금도 그 노래들 기억하나?”

“그럼요. 가끔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선배 생각이 제일 먼저 나요. ‘아, 우리 선배가 이 노래 참 좋아했지’ 하면서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유튜브를 검색했다. 그리고 조용히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카페 안의 잔잔한 클래식 음악 사이로, 40년 전 우리를 뜨겁게 했던 그 전주가 흘러나왔다.

Woke up to the sound of pouring rain...

비 내리는 창밖 풍경과 노래 가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마트폰의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록 사운드가 우리를 1989년의 그 눅눅한 써클룸으로 데려다주었다.

“선배, 지금 다시 부르면 그때 그 고음 나올까요?”

후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고음은 커녕, 가사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마음만은 아직 ‘Youth Gone Wild’지.”

우리는 다시 한번 웃었다. 40년 전, 스키드로우의 노래를 매개로 연결되었던 두 청년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입구에서 다시 만났다. 그가 기억해 준 나의 모습이 ‘항상 노래를 부르던 선배’였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노래가 나의 가장 뜨거웠던 시절의 상징인 ‘스키드로우’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카페를 나설 때, 비는 어느덧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젖은 아스팔트를 비추고 있었다.

“선배, 조만간 동기들 다 같이 모일 때 노래방 한번 가시죠. 스키드로우 메들리 준비해 오셔야 합니다.”

“허허, 이 사람아. 목 다 쉰다. 그래도… 연습은 좀 해보지.”

멀어져 가는 후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 그랬구나. 내가 스키드로우만 불렀구나.”

내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4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인생은 때로 거칠고 소란스러운 록 음악 같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모든 소음조차 아름다운 선율이었음을.

나는 차에 올라타 오디오를 켰다. 그리고 가장 크게 볼륨을 높였다.

*“We are the youth gone wild!”*

도심의 소음 속으로 나의 청춘이, 그리고 우리의 스키드로우가 다시 한번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일상 #재회 #추억 #스키드로우 #청춘 #40년지기 #인생은노래처럼

https://youtu.be/qjuEXKwnkLE?list=RDqjuEXKwnkLE

Skid Row - I Remember You (Official Music Video)You're watching the official music video for Skid Row - 'I Remember...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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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astard | 작성시간 26.06.22 ‘I Remember You’의 전주가 흘러나오는 순간, 저도 같이 1989년 그 써클룸으로 시간 여행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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