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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킬

마지막 불꽃 (The Last Flame)

작성자화랑|작성시간26.06.05|조회수42 목록 댓글 0

#팝 #락 #메탈 #재즈 #블루스 #클래식

마지막 불꽃 (The Last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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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5일, 뉴욕

성흔은 지현의 손을 잡고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6월의 햇살은 따스했고, 공원은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로 활기찼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는 팝의 여왕 머라이어 캐리가 소니 뮤직의 사장 토미 모톨라와 결혼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세기의 결혼이라며 떠들었지만, 성흔에게 세상의 전부는 바로 옆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지현이었다.

“성흔아, 저 사람들 봐. 정말 행복해 보이지?”

지현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신부의 웨딩드레스 사진이 실린 신문을 향해 있었다.

“우리가 더 행복한데?”

성흔이 씩 웃으며 지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현은 그 말에 배시시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샴푸 향이 바람을 타고 성흔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성흔은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은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풋풋한 연인이었고, 세상은 온통 그들의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도 저렇게 멋진 결혼식 올릴까?”

지현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설렘 뒤에 아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그늘을 성흔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사랑에 빠진 연인의 당연한 꿈이라 여겼을 뿐이다. 그는 지현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줄게.”

그 약속이, 지킬 수 없는 가장 아픈 맹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성흔은 익숙한 지현의 샴푸 향이 희미하게 남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떴다. 하지만 옆자리는 차갑게 비어 있었다. 늘 아침을 깨우던 지현의 목소리도, 주방에서 들려오던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대신 침대 옆 협탁 위에 하얀 편지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성흔에게.”

익숙한 그녀의 글씨체였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은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어. 어제 공원에서 네 어깨에 기대어 미래를 꿈꾸던 그 순간조차도 진심이었어. 그래서 더 미안해.

나는 네 곁을 떠나야만 해. 이유를 묻지 말아줘. 네가 알게 되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그냥 내가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줘. 너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

부디 나를 원망하고, 빨리 잊어줘. 그게 내가 너에게 바라는 마지막 부탁이야.

정말, 정말로 사랑했어. 안녕.」

편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어제, 그렇게 행복하게 웃던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옷장에는 그녀의 옷가지 몇 벌이 사라져 있었고, 욕실에 있던 그녀의 칫솔과 로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떠나버렸다.

성흔은 미친 사람처럼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에게,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께도 연락했지만 모두가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증발해버렸다.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이 되었다. 성흔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웃음을 잃었고, 세상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했지만, 그에게 시간은 그녀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독약일 뿐이었다.

그는 수없이 어제의 공원을 되감았다. 그녀의 모든 표정, 모든 몸짓, 모든 말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결혼 이야기를 할 때, 설렘 속에 잠시 스쳤던 그녀의 눈빛 속 그늘의 의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겠다’는 그의 말에, 부서져라 그를 끌어안던 그녀의 팔에 담겨 있던 것은 기대가 아니라 애처로운 절박함이었다.

그는 모든 신호를 놓쳤다. 사랑에 눈이 멀어, 그녀가 보내는 마지막 신호를 보지 못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행복의 순간은, 사실 그녀가 준비한 가장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마지막 인사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성흔은 무너진 일상을 겨우 일으켜 세우며 살았다. 음악을 좋아했던 지현을 따라 듣기 시작했던 록 음악은 이제 그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2002년 6월 5일

라디오에서는 펑크 록의 전설적인 밴드 ‘레이먼즈’의 베이시스트 디 디 레이먼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성흔은 지현과 함께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열광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지현이 떠난 지 정확히 9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날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어디선가 이 소식을 들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2004년 6월 5일

팝스타 제니퍼 로페즈가 가수 마크 앤소니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는 뉴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1년 전, 머라이어 캐리의 결혼 소식을 들으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던 그날이 떠올라 성흔은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사무치는 그리움만이 흉터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2009년 6월 5일

또다시 6월 5일. 성흔은 무심코 켠 TV 뉴스에서 싱어송라이터 제프 핸슨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젊은 재능의 안타까운 죽음. 그 순간, 성흔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흐느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현의 오랜 친구였다.

“성흔 씨… 저 기억하세요? 지현이 친구예요.”

“네, 기억합니다. 그런데 무슨…”

“지현이가… 오늘 새벽에… 갔어요.”

성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수화기 너머의 울음소리만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작은 장례식장에서 그는 16년 만에 지현과 마주했다. 액자 속 그녀는 16년 전, 그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지현의 친구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에게 다가와 작은 상자를 건넸다.

“지현이가… 성흔 씨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상자 안에는 낡은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또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성흔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난 이제 이 세상에 없겠지. 너무 오랫동안 너를 아프게 해서 미안해.

사실 난 오랫동안 아팠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건, 너를 만나기 바로 전이었어. 너를 만나고 너무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괴로웠어. 나의 마지막 모습으로 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가장 예쁘고 건강한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싶었어. 그래서 떠날 수밖에 없었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몰라.

네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빨리 나를 잊기를 바랐어. 하지만 매년 6월 5일이 되면, 우리가 함께했던 그날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널 생각했어. 네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들으면서 말이야.

성흔아, 넌 내게 세상의 전부였어. 내 짧은 생의 가장 눈부신 불꽃이었어. 이제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할게. 부디 나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지 말고, 행복해야 해. 꼭 그래야 해.

영원히 너를 사랑하는, 지현이가.」

성흔은 편지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오열했다. 그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그녀가 숨겼던 불안의 그림자, 사랑한다는 말 뒤에 삼켜버린 마지막 인사,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 떠난 것이었다. 그가 받게 될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이기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녀가 떠난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눈부시게 타오르다 꺼져버린 불꽃.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태워 그에게 가장 찬란한 순간을 선물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성흔은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 깊이 그녀를 새겼다. 그들의 사랑은 짧았지만, 그 어떤 사랑보다 뜨거웠고 진실했다.

이제 성흔은 알고 있었다. 16년 전 6월 5일,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서 그들이 나눈 것은 단순한 미래의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될 사랑의 맹세이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작별 인사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남긴 그 마지막 불꽃의 온기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남긴 사랑의 방식이었으니까.

https://youtu.be/mIhI23gBBPQ?list=RDmIhI23gBB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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