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잿더미 위에서: 카운트가 남긴 잔혹한 유산
노르웨이의 밤은 서늘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수정처럼 맑았으나, 그 심연에는 태고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1992년 6월 6일, 베르겐 외곽의 홀멘콜렌 목조 성당이 창백한 달빛 아래 서 있었다. 12세기에 세워진 이 성지는 북구의 고대 신들을 몰아내고 세운 기독교의 승전비와도 같았다.
그 어둠을 가르고 한 사내가 움직였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그의 눈에는 증오를 넘어선 기괴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의 가방에는 휘발유 통과 북유럽 신화 서적, 그리고 톨킨의 문고판이 들어 있었다. "오딘의 이름으로, 이 이방인의 제단을 정화하리라." 그가 그은 성냥불은 순식간에 고목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단순한 방화가 아니었다. 수천 년간 억눌려온 북방의 야만성이 '블랙 메탈'이라는 기괴한 선율을 빌려 터져 나온 광기의 서막이었다.
1995년 4월, 베르겐 근교의 한 교도소에서 나는 그 광기의 실체와 마주했다. 크리스티안 비케르네스, 세간에 '카운트 그리쉬나크'라 알려진 사내였다. 그는 정갈한 차림으로 나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손은 불과 2년 전,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유로니무스의 몸에 23번의 칼날을 박아넣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의 고저 없이 낮고 일정했다. "사람들은 나를 살인자라 부르지만, 나는 그저 청소부였을 뿐입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경멸하며, 전쟁과 투쟁만이 스칸디나비아의 진정한 정신이라 설파했다. 그의 논리는 서늘할 정도로 정교했으며, 그 확신은 광기보다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었다.
카운트의 내면은 이라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보낸 유년 시절과 아버지의 폭력, 그리고 톨킨의 세계관 속 '오크'에 대한 매료로 점철되어 있었다. 1987년 어머니가 사준 기타는 그에게 칼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그는 '우르크하이'라는 원맨 밴드를 결성했고, 오슬로의 어둠 속에서 '헬베테' 레코드숍의 주인 유로니무스를 만났다. 그러나 카운트에게 유로니무스는 그저 '말'뿐인 쇼맨에 불과했다. 카운트는 행동을 원했다. 그에게 블랙 메탈은 음악을 넘어 기독교 문명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잃어버린 북유럽의 영혼을 되찾는 주술적 의식이었다.
1993년 8월 10일 새벽, 두 사람의 갈등은 피의 파국으로 치달았다. 카운트는 유로니무스의 아파트를 찾아가 도망치는 그를 추격해 처단했다. 23군데의 자상은 블랙 메탈 씬의 왕좌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인장이었다. 체포 당시 그의 집에서는 대성당을 폭파하기 위한 150kg의 다이나마이트가 발견되었고, 법정에서 21년형을 선고받는 순간에도 그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현대의 법을 조롱했다.
감옥 안에서도 그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기타 대신 키보드로 빚어낸 선율은 더욱 차갑고 영적인 울림을 담아냈으며, 대중은 그를 경멸하면서도 그 악명 높은 신비주의에 매료되어 앨범을 사들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멀리 불타버린 판토프트 교회의 잔해가 환영처럼 스쳤다. 카운트 그리쉬나크, 그는 평화로운 노르웨이의 이면에 숨겨진 원시적 광기를 일깨운 괴물인가, 아니면 타락한 현대를 정화하려 했던 광기 어린 선지자인가. 분명한 것은 그가 지핀 불길이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의 도덕과 윤리마저 태워버렸다는 사실이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버줌(Burzum)의 찢어지는 듯한 스크리밍은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이자 지옥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가석방되어 은둔하고 있지만, 그가 남긴 로우-파이(Lo-fi) 사운드와 극단적인 사상은 여전히 인터넷의 어두운 구석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닌,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파괴 본능을 상징하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그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내면에는 어떤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당신은 그 심연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피오르드의 물결 아래, 1992년의 불꽃과 유로니무스의 피는 여전히 식지 않은 채 흐르고 있다. 블랙 메탈의 전설은 그렇게 잿더미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