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탈
두려움 없는 사랑
3월 21일, 니코의 스튜디오
지하 스튜디오의 낡은 철문을 열자, 묵직한 공기와 함께 희미한 인센스 향이 수를 맞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밴드 포스터와 LP판, 한쪽 구석에 무심하게 쌓인 이펙터와 케이블 뭉치들. 세상의 소음과 분리된 이곳은 니코의 왕국이었다. 그리고 수는 어느새 그 왕국의 유일한 방문객이 되어 있었다.
“왔어?”
헤드폰을 목에 걸친 채 니코가 의자를 돌려 수를 보며 웃었다. 며칠 밤을 샌 듯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언제나처럼 깊고 다정했다. 그는 락커 시절의 날카로움 대신 작곡가의 고독한 섬세함을 두르고 있었다.
“네! 오는 길에 커피 사 왔어요. 잠도 좀 깰 겸.”
수는 컵 홀더에 담긴 커피 두 잔을 들어 보이며 발랄하게 웃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칙칙한 스튜디오에 한 줄기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니코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내민 따뜻한 커피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마침 필요했는데.”
수는 자연스럽게 그의 작업용 컴퓨터 옆 보조 의자에 앉았다. 졸업 작품의 배경 음악을 의뢰하러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던 자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제자리인 양 편안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복잡한 음표와 파형이 가득했다.
“작업은 좀 어때요? 제 춤이랑 잘 어울릴까요?”
“거의 다 됐어. 네가 보내준 영상 수십 번은 돌려본 것 같아. 너의 움직임, 그 안에 담긴 감정선을 어떻게 음악으로 옮길까 고민하는 거, 꽤 재밌는 작업이야.”
니코의 말에 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무심한 말투 속에 상대를 향한 깊은 존중과 애정을 담아냈다.
“오늘이 3월 21일이네.”
니코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날이에요?”
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니코는 모니터 한쪽 구석에 띄워놓은 달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메탈 팬들한테는 꽤 의미 있는 날이거든. 기념할 일도, 추모할 일도, 심지어 황당한 사건도 많았던 날.”
“오, 정말요? 알려주세요!”
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녀는 니코가 들려주는 메탈의 역사, 그 거칠고 투박한 세계의 이야기가 좋았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일부를 조금씩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니코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마우스 휠을 스크롤하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앨범이 꽤 많이 나온 날이야. 1986년 오늘, Keel이라는 헤비메탈 밴드가 ‘The Final Frontier’라는 앨범을 냈어. 80년대 특유의 화려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음악이지. 네 밝은 이미지랑 좀 어울릴지도.”
https://youtu.be/dKzWZqG8YGQ?list=RDdKzWZqG8YGQ&t=2
Because The Night (KEEL 1986)First single from "The Final Frontier"www.youtube.com
그는 스피커 볼륨을 살짝 높여 Keel의 음악을 짧게 들려주었다. 경쾌한 기타 리프와 시원한 보컬이 스튜디오를 채웠다. 수는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였다.
“어? 생각보다 신나는데요? 메탈이라고 해서 무조건 어둡고 무서운 줄 알았는데.”
“그게 메탈의 매력이지. 장르가 워낙 세분화되어 있어서. 봐, 2016년 오늘 재발매된 Candlegoat의 앨범은 정반대야. ‘Tenebrosa’… 어둠, 암흑이라는 뜻인데, 제목처럼 한없이 무겁고 느린 음악이지. 이건 딱 50장 한정판 카세트테이프로만 나왔대.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앨범일 거야.”
그는 희귀한 유물을 설명하는 고고학자처럼 말을 이었다.
“최근으로 와서는 2025년 오늘, 그러니까 바로 작년이지. 독일의 Defender, 콜롬비아의 Infernal, 벨기에의 Effroi 같은 밴드들이 새 앨범을 냈어. 전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메탈을 만들고, 듣고, 열광하고 있다는 증거야.”
니코의 눈이 잠시 먼 곳을 향했다. 마치 시공간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지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생일인 사람도 많아. UFO의 드러머 앤디 파커, Vixen의 베이시스트 쉐어 로스… 특히 Stryper의 드러머 로버트 스위트는 오늘 환갑을 훌쩍 넘겼겠네. 평생을 한 장르에 바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의 목소리에 옅은 씁쓸함과 경외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한때는 자신도 그들처럼 무대 위에서 평생을 보내리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마냥 좋은 날만은 아니야.”
니코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수를 바라보았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를 추모하는 기간이기도 하거든. 3월 19일에 비행기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어. 스물다섯, 너무 젊은 나이였지. 그의 죽음 이후 며칠간은 전 세계 팬들이 그를 기리는 시간이야. 어제는 린킨파크의 체스터 베닝턴 생일이었고. 그래서 오늘까지도 온라인에선 추모가 이어지지.”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순간 숙연해졌다. 수는 니코의 눈에서 스쳐 지나가는 슬픔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아티스트를 향한 팬심이 아니었다. 너무 일찍 재능을 불태우고 사라져 버린 별들에 대한, 같은 길을 걷는 예술가로서의 깊은 공감과 연민이었다.
“슬픈 이야기네요…”
“그렇지. 그래서 메탈은 단순히 시끄러운 음악이 아니야. 삶의 환희와 분노, 그리고 죽음과 상실까지 모든 걸 담고 있거든. 때로는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니코는 다시 씁쓸하게 웃으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에 흑백 머그샷 사진이 나타났다.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보위와 이기 팝이었다.
“이건 또 뭐예요? 엄청 멋있는데요?”
“멋있긴. 1976년 3월 21일, 공연 끝나고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을 때 찍은 사진이야. 락스타의 삶이란 게 이런 거지. 빛나는 무대와 차가운 유치장 사이를 오가는… 아, Mötley Crüe는 더했어. 80년대에 캐나다 투어 중에 호텔에서 하도 난동을 부려서 도시 하나에서 영구적으로 공연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지. TV를 창밖으로 던지는 게 일상이었던 사람들이니까.”
니코의 이야기에 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슬픔과 추모의 분위기는 어느새 황당하고 유쾌한 스캔들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그녀의 감정을 쥐락펴락했다.
“정말… 두려움 없는 사랑이네요.”
수가 불쑥 말했다.
니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그 한 마디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수는 잠시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스튜디오의 희미한 조명 아래, 니코의 얼굴에는 오래된 밤을 견디고 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단한 아름다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사람들이요. 다들 조금씩 망가지고, 다치고, 때로는 너무 빨리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자기 음악을 붙잡고 있었잖아요. 누가 뭐래도,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저는 그런 게… 무섭기도 한데, 이상하게 부럽더라고요.”
니코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수의 말은 단지 70년대와 80년대의 전설적인 뮤지션들에 대한 감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든 걸 걸고 사랑하는 거네요. 음악이든, 사람이든.”
수가 덧붙였다.
그 순간 니코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마치 누군가 제 가슴 한가운데 숨겨둔 문을 예고도 없이 열어젖힌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젊은 날의 자신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기타를 메고 서 있던 시절은 지나갔고, 지금 그의 앞에는 생활비 고지서와 마감 날짜, 광고음악 샘플 파일, 의뢰인들의 수정 요청이 더 자주 놓여 있었다. 꿈은 완전히 죽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굶주린 짐승처럼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실패한 사람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수는 그런 그를 조금도 실패한 사람처럼 보지 않았다.
수의 눈에는 아직도 무대의 조명이 남아 있었다. 아니, 무대가 사라진 뒤에도 끝내 꺼지지 않은 불씨 같은 것이 있었다. 니코는 그 시선이 두려웠다.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정적이 흘렀다.
https://youtu.be/ItKz7xfDDtY?list=RDItKz7xfDDtY
Tears Of Fire (KEEL 1986)Second single from the 1986 "The Final Frontier" album, filmed on location across the U.S.www.youtube.com
아까까지 스피커를 채우고 있던 Keel의 멜로디가 여전히 공기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밝고 낙관적인 80년대의 기타 리프, 그러나 그 잔향 너머에는 랜디 로즈의 짧은 생, 체스터 베닝턴을 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밴드가 찍어낸 50장 한정 카세트테이프의 적막한 숭고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겹쳐졌다. 메탈은 늘 그랬다. 찬란함과 파멸, 허세와 진심, 젊음의 광기와 상실의 침묵이 한 몸처럼 엉켜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의 수와 자신 역시 그 결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니코는 손을 뻗어 음악을 껐다.
툭.
작은 클릭 소리 하나로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해졌다. 형광등이 내는 미세한 떨림, 낡은 컴퓨터 본체의 팬 돌아가는 소리, 두 사람이 숨 쉬는 리듬만이 어둑한 공간에 남았다. 그 고요는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말해진 뒤에만 찾아오는 종류의 고요였다.
“수...”
니코가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자신이 더는 안전한 선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름은 늘 사람을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네?”
수의 대답은 평소처럼 밝았지만, 그 안에도 조심스러운 기대가 실려 있었다.
니코는 모니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를 바로 바라봤다가는 끝내 감정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다. 손은 마우스를 잡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손바닥은 뜨거웠다. 커피 때문은 아니었다.
“네 졸업 작품 음악 말이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았다.
“컨셉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침묵 속에서, 니코는 그녀가 미세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새로운 프로젝트 파일을 열었다. 화면 위에 새 세션이 뜨고, 텅 빈 트랙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아직 아무 음도, 아무 이름도 없는 상태. 그러나 이상하게 그 공백은 두렵지 않았다. 마치 이제야 정말 자신이 써야 할 곡 앞에 앉은 기분이었다.
“네 춤을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니코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근데 자꾸 돌려보다 보니까, 그 안에 단순한 아름다움만 있는 게 아니더라. 두려움도 있고, 망설임도 있고, 그래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도 있었어. 넘어질 걸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사람의 움직임 같은 거.”
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예쁜 배경음악으로는 안 될 것 같아졌어.”
니코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살짝 올라갔다.
“네 춤에 내가 지나온 메탈의 시간들을 다 담아보고 싶어졌어. 80년대의 허세와 찬란함도, 아무도 몰라주는 밴드가 마지막처럼 찍어낸 음반의 외로움도, 너무 빨리 사라져버린 천재들의 비극도, 그럼에도 오늘 또 어딘가에서 새 앨범을 내는 사람들의 집요한 생명력도.”
그는 아주 천천히 첫 음을 눌렀다.
낮고 거친 음이 스튜디오의 바닥을 스치듯 울렸다. 그 뒤를 이어 조금 높은 음이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마치 상처 난 짐승이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빛을 향해 걸어 나오는 듯한 멜로디였다. 거칠지만 섬세했고, 우울했지만 묘하게 아름다웠다.
니코는 다시 한 음, 또 한 음을 쌓아 올렸다. 기타가 아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소음, 모든 함성, 모든 상실은 결국 이런 순간을 위해 몸 안에 남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려움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끝내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못했다.
돌아보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혹은 너무 많은 것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 둘은 때때로 같은 뜻이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수가 웃고 있다는 것을. 환하게, 그러나 함부로 깨뜨릴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마치 긴 겨울 끝에 처음으로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봄빛처럼.
3월 21일.
누군가에겐 앨범 발매일이고, 누군가에겐 생일이며, 누군가에겐 추모의 계절이고, 또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스캔들의 날짜일 것이다. 수많은 이름과 리프와 사고와 전설이 겹겹이 쌓인 날.
그리고 이제, 그 모든 이야기의 가장 안쪽에, 아주 작고도 선명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 더 포개지고 있었다.
세상이 모르는 지하 스튜디오에서.
낡은 철문 너머의 어둡고 따뜻한 왕국에서.
두려움을 아직 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끝내 사랑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