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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의 랩소디

작성자화랑|작성시간26.06.21|조회수55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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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의 랩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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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1일, 하지(夏至)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서울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낡은 LP 바 ‘크로울리스 캐슬(Crowley's Castle)’의 문을 열자, 눅눅한 바깥 공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희미한 조명 아래 먼지 쌓인 앨범 재킷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오래된 나무와 위스키, 그리고 진공관 앰프가 달아오르며 내뿜는 특유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의 주인이자 유일한 디제이인 현우는 턴테이블 앞에 앉아 막 배송된 따끈한 신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날아온 Fogos의 블랙 메탈 앨범 《Of Wyrm and Men》. 그 옆에는 Altar of Flames와 Draugrakr의 디지털 싱글 발매 소식이 적힌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굳이 LP와 CD를 고집하는 자신과, 여전히 이 어둡고 시끄러운 음악에 영혼을 바치는 밴드들. 어쩌면 모두가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사장님, 여기 비도 오는데 신청곡 하나 괜찮겠습니까?”

단골손님인 진섭이 젖은 우산을 입구에 세워두며 말했다. 그는 80년대 록스타처럼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빛바랜 주다스 프리스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엔 뭘 들어야 속이 시원할까요, 형님?”

현우가 묻자, 진섭은 바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었소? 돈 에어리(Don Airey) 선생 탄신일 아니오. 그 양반의 손길이 닿은 곡이라면 뭐든 좋지만… 역시 ‘미스터 크라울리’만 한 게 없지.”

그 말에 현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지 오스본의 1집 《Blizzard of Ozz》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스피커에서 장엄하고 고딕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돈 에어리의 그 전설적인 인트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어두운 제단을 비추는 듯한, 경건하면서도 사악한 선율이었다.

“크으… 이 맛이지.”

진섭이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감탄했다.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 째고 전영혁 아저씨 라디오 듣던 거 생각나네. 돈 에어리 스펠링이 궁금해서 방송국에 엽서까지 보냈었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참… 낭만 있었지.”

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비슷한 추억이 있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음악 잡지를 탐독하고, 라디오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며 미지의 아티스트 이름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 내려가던 밤들. 그 시절의 열정은 지금의 편리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뜨거움을 품고 있었다.

그때, 바의 문이 다시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섰다. 검은 가죽 재킷에 찢어진 청바지, 부츠 차림의 그녀는 묘한 카리스마를 풍겼다.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녀는 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말없이 메뉴판만 노려봤다.

“오늘 또 한 명의 영웅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죠.”

현우가 킵 윙어(Kip Winger)의 앨범을 슬쩍 꺼내 보이며 말했다.

“윙어(Winger) 말입니까? 허, 그 잘생긴 양아치 형님.”

진섭이 웃었다.

“음악은 또 더럽게 어려워서 말이야. 클래식 발레를 전공했다나 뭐라나. 얼굴만 믿고 가는 밴드인 줄 알았는데, 들어보면 연주가 아주 살벌했지. 탑 오브 더 월드야, 정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섭의 주다스 프리스트 티셔츠를 지나, 벽에 걸린 수많은 앨범 재킷들 사이를 헤매다 한곳에 멈췄다. 영화 ‘내추럴 본 킬러’의 사운드트랙 앨범이었다.

“줄리엣 루이스(Juliette Lewis)도 오늘 생일인데.”

여자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현우와 진섭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그 배우… 좋아하시나 봐요.”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배우라기보단… 그냥 줄리엣 루이스가 좋아요. 예쁘진 않지만, 아니 오히려 못생겼지만, 스크린을 집어삼킬 것 같은 그 에너지가… 미치도록 부러웠어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 기억해요?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 진짜였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동경과 약간의 체념이 섞여 있었다.

“저도 밴드를 했었어요. 10년쯤 전에. 그때 제 롤모델이 줄리엣 루이스였죠. 무대 위에서 모든 걸 불태워버리는 그런 로커가 되고 싶었어요.”

여자의 이름은 수연이었다. 홍대 인디씬에서 ‘블랙 맘바’라는 밴드의 보컬로 활동했던 그녀는, 한때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졌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멤버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결국 그녀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오늘, 10년 만에 멤버들을 만났어요. 다들 잘 살고 있더군요. 결혼해서 애 낳고, 회사에서 승진하고… 저만 빼고 다들 어른이 된 것 같았어요. 음악 얘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더군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듯이.”

수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도망쳐 나왔어요. 옛날 생각이 나서… 이런 곳에 오면 좀 괜찮아질까 싶어서.”

바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랜디 로즈의 날카로운 기타 솔로가 끝나고, 오지 오스본의 처절한 목소리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진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의 옆으로 다가갔다.

“혹시… 밴드 ‘블랙 맘바’의 수연 씨 아니십니까?”

수연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가 고등학생 때, 형님들 공연 보고 밴드 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특히 수연 누님 카리스마는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제겐 줄리엣 루이스보다 더 멋진 영웅이셨습니다.”

진섭의 말에 수연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그저 치기 어린 시절의 불장난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의 뜨거웠던 시절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현우는 말없이 턴테이블의 음반을 바꿨다.
그가 고른 것은 1985년 6월 21일에 발매된 라우드니스(Loudness)의 EP, 《Gotta Fight》였다. 타카사키 아키라의 폭발적인 기타 리프가 스피커를 찢을 듯이 터져 나왔다. ‘싸워야만 해!’라고 외치는 듯한 강력한 사운드였다.

음악이 바뀌자 바의 공기도 달라졌다. 수연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다시 희미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섭은 주먹을 꽉 쥐고 헤드뱅잉을 했고, 현우는 볼륨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돈 에어리의 장엄한 선율로 시작된 밤은, 킵 윙어의 화려한 테크닉을 거쳐, 줄리엣 루이스의 광기 어린 열정을 지나, 라우드니스의 투쟁적인 외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과거의 영웅들과 오늘의 우리가 하나의 음악 안에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고마웠어요. 신청곡 하나만 더 틀어주고 가세요.”

“어떤 곡으로요?”

“오늘 나온 신보 중에… 가장 시끄럽고, 가장 어두운 걸로요.”

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Fogos의 《Of Wyrm and Men》 앨범에 바늘을 올렸다. 스페인의 차가운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원초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블랙 메탈 사운드가 ‘크로울리스 캐슬’을 뒤흔들었다.

수연은 그 폭풍 같은 사운드를 온몸으로 맞으며 바의 문을 열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은 맹렬한 블래스트 비트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다.

가장 긴 낮이 가장 어두운 밤으로 저물어가는 6월 21일. ‘크로울리스 캐슬’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메탈이 교차하고, 잊혔던 영웅과 상처 입은 영혼이 서로를 위로하며, 새로운 내일을 향한 랩소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악은, 멈추지 않을 터였다.

https://youtu.be/5DECOxH0y_Y?list=RD5DECOxH0y_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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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Forbidden | 작성시간 26.06.21 이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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