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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말메종에 있는 나폴레옹 조세핀이 살던집

작성자수선화|작성시간11.06.29|조회수527 목록 댓글 0


말메종성은 나폴레옹의 첫번째 부인인 조세핀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성입니다. 파리에서 50여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조용한 도시인 말메종에 위치하고 있고요. 이혼후 이 성은 조세핀의 소유가 되고 이 곳에서 조세핀은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1층 끝쪽 방인 이 방은 하프와 작은 피아노가 갖추어져 있는 음악실입니다.
이 곳에서 나폴레옹은 각료회의를 자주 소집했다고 합니다. 왼쪽에 있는 초상화는 나폴레옹의 어머니 초상화이고 오른쪽 초상화는 조세핀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가 잘려서 미안합니다~~~
2층에는 나폴레옹의 침실이 있고 3층에 황후의 침실이 있습니다. 천장이 완전히 타원형인 이 침실은 지상의 공간이 아닌 듯한 느낌을 주더군요. 꿈속의 침실이라고나 할까. 황후는 보통 때는 그 옆에 딸린 밝고 소박한 작은 침실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신고전주의의 선두주자 자크 루이 다비드


자크 루이 다비드는 혁명의 물결이 프랑스를 휩쓸자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나폴레옹의 공식화가였던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정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다비드의 작품 중에 나폴레옹의 이미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도>다.

사나운 말 위에 앉아 있는 나폴레옹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알프스 저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나폴레옹 발밑에는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대제와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정교하게 꾸며낸 이미지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말 대신 산길에 강한 노새를 타고 산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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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도. 1800~1801년, 캔버스에 유채, 272*232,

  말메종 샤토 국립미술관 소장


나폴레옹은 전쟁터를 배경으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앞발을 든 말 위에 평온한 모습으로 다비드에게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프랑스 혁명 중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혁명을 극대화 시킨 작품이 <마라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1793년 여름, 프랑스 혁명 중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서 다비드는 혁명 지도자 마라를 순교자로 표현해 그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저널리스트이자 급진주의자 장 폴 마라<1743~1793>는 민중의 정치 참여를 고취시켰던 프랑스 정치인이다. 마라의 급진주의 성향은 대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세력인 프랑스 왕권주의자들에게는 제거해야만 하는 정적이었다.

1793년 귀족 출신의 열렬한 공화당원이었던 여인 샬롯트 코르도네가 거짓 편지를 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피부병으로 욕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혁명정부는 이 사건을 화가 다비드에게 기록해달라고 의뢰한다.

피에르 폴 프뤼동, [왕비 조세핀]
The Empress Josephine
c. 1805, Oil on canvas, 244 x 179 cm
Musée du Louvre, Paris

서양 문명은 산수 중심의 동양화와 달리 인물 중심의 회화를 발달시켰습니다. 그래서 여성을 그린 그림이 많고 그렇게 그려진 여성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과 환영을 남긴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부인이었던 조제핀도 그런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그녀의 모습을 보노라면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나폴레옹 같은 영웅을 사로잡았고 또 뭇사람들의 뇌리에 그녀를 그렇게 매력적인 여성으로 남게 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렇게 뭇 남자들을, 영웅 중의 영웅을 사로잡는 여성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런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한편으로는 진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삶, 그런 삶이 바로 이런 이들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머리 속은 온통 당신 생각뿐이었소. 당신의 모습, 그리고 어젯밤의 멋진 기억은 내 모든 감각을 들뜨게 만들었소.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조제핀이여, 당신은 나의 마음에 실로 이상한 마법을 걸었소.”


나폴레옹의 이 편지 글에서 알 수 있듯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뛰어난 사랑의 전략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하직하며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조제핀!”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남자의 마음을 그 뿌리까지 훔칠 줄 아는 수완가였지요. 그녀를 향한 나폴레옹의 열정은 무엇보다 조제핀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가장 밝은 색채로 빛나는데, 조제핀의 원 이름 마리-조제프-로즈 타셰 드 보아르네의 조제프를 여성형인 조제핀으로 고쳐 부른 게 나폴레옹이었다고 합니다.(그 전에는 주로 로즈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로 그 이름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으니 ‘사랑의 여왕’으로서 조제핀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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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마라의 죽음> 이 작품의 구성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화면 위는 희미한 조명으로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으며 화면 아래 욕조에 마라가 왼손에는 편지를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죽어있다.
마라의 죽음
.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65*128, 벨기에 왕립 미술관 소장

마라의 가슴은 칼에 찔린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욕조 옆에 두었던 수건에는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져 있다. 욕조 밖에는 그를 찌를 때 사용한 칼이 피에 물든 채 놓여져 있다. 마라가 왼손에 쥐고 있는 편지는 샬롯트 코르도네가 쓴 자신의 소개장이다. 그녀는 마라에게 자비를 구하려고 했고 마라가 그녀에게 기대했던 것은 지롱드 당에 대한 정보였다.

탁자에는 잉크병과 깃펜, 편지와 돈이 놓여져 있는데 편지와 돈은 미망인을 위한 마라의 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잉크병과 깃펜은 저널리스트였던 마라를 상징하고 있다. 탁자 아래 ‘마라에게, 다비드가’ 이라는 화가의 사인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화가의 사인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다비드는 마라가 죽은 후 대중들에게 전시되었던 시체를 보았지만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살해당했던 당시 상황을 그대로 표현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신고전주의의 선두자다. 다비드는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제정한 최고상 ‘로마상’을 수상함으로서 이탈리아에서 공부한다. 5년 동안의 로마 유학으로 다비드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고히 정립한다. 귀국 후 다비드는 로마 고대사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고 그 작품은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다비드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기희생과 의무, 헌신 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을 작품에 표현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왕정 시대의 최고의 영예를 버리고 혁명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자코뱅 당에 일원이 됨으로서 막강한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그는 브뤼셀로 망명한다. 망명지에서 조국 프랑스로부터 귀국 제의를 받지만 다비드는 거절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혁명의 격동기에서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끌었던 다비드에게 프랑스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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