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강성은
어항 속에서 놀다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목소리만 존재하는 그가
한 편의 유서를 읽으며
내 머리채를 잡고 물 속에서 끌어냅니다
원추리꽃 / 김내식
길을 간다
개울 가
초록에 노랑이 우뚝하다
낮은데로 향하는 하심으로
흐르는 물에 비친
원추리꽃
믿음은 무엇이고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 자
누구인가
붕붕거리는
벌들의 잦은 날개 짓이
평화롭다
천둥은 / 이혜영
"나 내려간다!"
비가
세상에 알리는 기척.
옛날, 할아버지
방문 앞에서 하시던 헛기침 같은 것.
개미는 문단속 잘하고
병아리는 엄마 품에 숨고
빨랫줄에 마른 빨래는 얼른 걷히고
풀잎들은 어깨를 낮추고,
"자아, 나 내려간다!"
우르르
천둥이 울린다.
아내의 등 / 고영민
아내의 등을 민다
그녀의 뒷모습, 한 페이지를
때수건으로 민다
기울게 쌓아올린 척추 마디
피사의 사탑을 생각하며
나는 아내의 등을 민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팔이 닿지 않는 그 가려운 탑신
아내의 등 사각지대엔
빨간 앵초꽃이 피어난다
세월의 한켠
묵념처럼 뒤돌아 앉은 삶
언제쯤 나는 말을 걸어야 하나
언제쯤 나는 말을 놓아야 하나
빈 명찰 같은 사람아
첫선을 보듯 앉아 있는 내 중년의 얼굴이
그녀의 등
볼록거울에 비친다
찔레꽃 / 강성범
첫사랑을 강변(江邊)에 묻고
흘러가는 세월이야
다들 그렇게 잊으면 되지 하면서도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여자가
허름한 주막집에서 외로움을 마신다
아침이 올 때까지
찔레꽃 하얀 얼굴로
그래 너는 슬피 우는 내 눈물인 것을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 목을 축여
상여(喪輿)처럼 걷다보니
나는 누구의 혼(魂)이며
너는 또 누구의 넋인지
찔레꽃 필 때가 되면
맷돌 같은 가슴에 어처구니없게도
그리움 하나 가시로 남아 있는
너는 찔레꽃
둥근 길/문 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장사익 - 찔레꽃 [불후의 명곡2 전설을 노래하다/Immortal Songs 2] | KBS 220226 방송 - https://youtube.com/watch?v=tMyCMS5z0G4&si=RxcZFXIBF9DM4lw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