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마시러 가자. 이왕이면 조용한 곳이면 좋겠다. 차밭의 단순한 실루엣 속에서 녹차향 바람을 맞고, 옛 고을 돌담길을 걸으며 시끄러운 속을 달래야겠다. 남쪽 마을 보성으로 고요를 찾으러 간다.

언덕에 차 나무가 줄을 서 있다. 이게 다다. 그런데 그 풍경이 참 근사하다. 'Simple is the best' 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보성 녹차밭은 그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여행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모은다. 잔뜩 기대를 하고 왔는데, 입구엔 삼나무 숲길이다. 전봇대처럼 쭉쭉 뻗은 나무들이 멋있긴 한데 왜 차나무가 아니라 삼나무일까. 이곳에선 삼나무뿐 아니라 편백나무, 주목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동백나무 등 약 300여만그루의 나무가 관상수이자 방풍림 역할을 한단다. 삼나무 덕에 차밭으로 가는 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제 본격적인 등반의 시작이다. 높지도 않은 언덕인데 꽤 가파르다. 요즘 같은 날씨엔 햇빛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멋진 풍경을 보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조금씩 오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니 자꾸 발길을 멈추게 된다. 아직 중간 정도 밖에 올라오지 않았는데 이미 그림이다. 저 전망대에 오르면 무엇이 보이려나. < 세 번 결혼하는 여자 > , < 여름향기 > , < 1박2일 > , < 여인의 향기 > 등 각종 드라마와 여러 광고의 배경이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도 유명한 풍경이다.
고맙게도 한번씩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을 따라 녹색 카펫처럼 보이던 차나무 결이 파도처럼 흔들린다. 바람이 유난히 시원하고 싱그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녹차향이 묻었기 때문인 듯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재배를 위한 밭인데, 사람들이 들어와 즐기고 관상하는 정원이기도 하다. 빛 좋은 날은 반짝하는 초록이, 비 오고 난 뒤에는 촉촉한 깨끗함이, 가을은 방풍 나무의 색 변화가, 겨울엔 설경이 좋아 사계절 어느 때나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드디어 전망대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이 바람은 바다로부터 온 것이구나. 방풍림을 거쳐 녹차밭으로 왔으니 풍욕이 따로 필요 없겠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손이 바쁘다. 조용할 줄 알았던 차밭 여행은 생각보다 다이나믹하다. 내려갈 때는 편백나무 산책로로 길을 잡아본다. 한바탕 땀을 흘린 탓인지 나무그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숲길을 내려와 입구까지 오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한다. 시중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하고 달콤한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한방울 남은 더위까지 날리고 다음은 박물관 차례다.


다원 옆에는 '한국차문화공원'이 있다. 이곳에 '한국차박물관'과 차제조공방, 다목적운동장, 야외무대 등 봄마다 열리는 다향제 위한 시설을 갖췄다. 이 중 차 제조공방에서는 차 생엽을 가지고 직접 차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차를 집에 가져가서 한잔씩 마실 때마다 여행을 추억할 테니 참 좋은 프로그램이다. 녹차는 구수한가 하면 쌉싸름하고, 온기 속에 깔끔한 뒷맛을 낸다. 차잎 뿐 아니라 물, 온도, 시간, 솜씨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니 참으로 시그니쳐한 기호식품이다.
보성은 < 동국여지승람 > , < 세종실록지리지 > 와 같은 고문서에 차의 자생지로 기록된 전통의 차 생산지다. 1939년부터 이곳에 인공 차밭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연간 4839톤의 차잎을 생산하며 전국 생산량의 40%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차박물관이 이곳에 있는 건 당연한 얘기겠다.
차 주전자를 닮은 박물관은 3개층의 전시실이 있고, 5층 전망대에서는 녹차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1층 문화실에서는 차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돕는다. 2층 차 역사실에서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차의 역사를 보는데 귀한 찻잔 등 유물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3층에는 차 생활과 함께 다례 교육실이 있어 다도를 배워 볼 수 있다.


보성 차가 좋아서인가. 강골마을에선 인물이 많이 나왔다. 예로부터 선비를 배출한 것은 물론 이용훈 전 대법원장, 이중재 국회의원 등 현대까지도 이어진다. 그래서 보성에는 '강골 가서 벼슬자랑 머리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입신양명은 바깥사람들이 했는데, 정작 강골마을의 가옥에선 안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가장 큰 특징은 중간채 높이를 낮춰 지은 점이다. 그래서 마당에 서면 건너편 오봉산이 지붕에 가려져 능선만 살짝 보이는 반면 마루 아래에서 보면 오봉산이 더 가까이 보인다. 안방마님이 방문턱에 팔을 걸고 고개를 들면 오봉산의 모습과 하늘이 가장 가깝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구조다. 이것은 바깥 출입이 어려웠던 아녀자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을 것이다. 또 안채에서는 사랑채와 솟을대문을 볼 수 있지만, 솟을대문에서는 안채를 볼 수 가 없다. 그러니까 안방마님은 방에 앉아 중간채 건물너머 손님이 사랑채까지 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반대로 손님은 그렇지 않다.
강골마을을 대표하는 집은 이용욱 가옥이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 중간문채에 사당과 연못까지 갖춰 이 지방 사대부집 건축양식의 주요 자료가 된다. 담장에 난 구멍도 재미있다. 구멍 바깥으로 우물이 있고, 이를 통해 담장 밖에서 빨래하는 아녀자들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밖에서는 가옥 안을 슬쩍슬쩍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소극적이고 은밀하면서 해학적이기도 한, 일종의 소통 구멍이었던 셈이다. 여러 소리가 오갔기 때문인지 구멍 밖 우물에는 '소리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재미있는 집은 이식래 가옥이다. 본채는 초가인데, 광은 기와를 얹은 와가이다. 그만큼 쌀의 생산과 보관, 농사가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이 이 정도니 이 마을이 얼마나 부농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강골마을의 백미는 열화정이다. 마을 안쪽으로 쑥 들어가면 숲이 시작되고 개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운치 있는 정자 하나가 있다. 조선 헌종 11년(1845년)에 이제 이진만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누마루 아래 작은 연못에서 보면 분위기가 끝내준다. 탁 트인 계곡이나 물가에 있는 정자는 보았어도 숲 속에 숨듯 자리잡은 정자는 흔치 않다. 마당에는 벚나무, 목련, 석류, 대나무 등이 어우러져 자연의 숲과 사람의 정원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좋은 차는 행복한 시간을 만든다. 물을 끓이고 준비하는 것부터 향과 맛을 음미하는 모든 시간이 자극적이지 않고 은근하다. 보성의 다원도 강골마을도 차 마시며 담소하듯, 두런두런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 여행 정보
☞ 보성 녹차밭(대한다원) 가는 법
경부고속도로 - 산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익산포항고속도로 - 순천완주고속도로 - 동순천IC에서 '여수, 광양항' 방면으로 좌측방향 - 무평로 - 신대교차로에서 '여수, 목포' 방면으로 우측방향 - 신대교차로에서 우측방향 - 17번 국도 - 남해고속도로 - 18번 국도 - 춘정교차로에서 '장흥, 벌교' 방면으로 좌회전 - 화보로 - 초당교차로에서 '목포, 장흥, 보성차밭' 방면으로 우측방향 - 녹색로 - 장수교차로에서 '회천, 한국차박물관, 녹차밭, 보성' 방면으로 우측방향 - 장수교차로에서 '안양, 회천, 한국차박물관, 보성차밭' 방면으로 좌측방향 - 녹차로 - 장수교차로에서 '안양, 화천' 방면으로 좌측방향 - 녹차로 - 봇재교차로에서 '봉산리녹차밭, 녹차소리문화공원' 방면으로 우측방향 - 녹차로
☞ 대중교통
보성시외버스터미널 - 보성~벌교(조성) 버스 승차 - 보성여중삼거리에서 보성~군학 버스 승차 - 대한다원 정류장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보성녹차밭: 검색어 '대한다원', '보성녹차밭'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1287-1
강골마을: 검색어 '강골마을입구' /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 주요 정보 >
보성 녹차밭, 대한다원
http://dhdawon.com / 061-852-4540
개장: 오전 9시 ~오후 7시 (퇴장 오후 8시까지)
입장료: 일반 3000원 / 초, 중, 고, 경로우대 2000원 / 장애인 1500원 / 국가유공자, 미취학여린이 무료
한국차박물관
http://www.koreateamuseum.kr / 061-852-0918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
관람료: 어른 1000원 / 청소년, 군경 700원 / 어린이 500원
전남보성 강골마을
http://gg.invil.org / 061-853-2885
보성군 문화관광
http://tour.boseong.go.kr / 061-852-2181
< 음식 >
보성 녹돈, 녹우: 녹차잎을 사료에 혼합해 키운 돼지고기와 소고기이다. 육질이 연하고 콜레스테롤 함양이 일반고기보다 적다고 알려져 있다.
- 농협녹돈(인터넷 주문): www.nhnokdon-mall.co.kr
- 특미관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93-13 / 061-852-4545
- 보성녹차떡갈비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27-1 / 061-853-0300
< 숙소 >
보성이용욱고택 : 중요민속자료 제 159호로 지정된 조선후기 사대부가옥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강공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특별한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가격: (행랑)10만~(사랑방)20만원
예약문의: 061-852-5271 / http://www.leeyongwookgotaek.com / 전라남도 보성군 특량면 오봉리 강골길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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