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신앙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실 때 최대의 걸림돌이 된 것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빈번히 예수님에게 나와 시비를 걸어 왔으며 예수님도 그들을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바 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예수님과 같이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 이런 큰 차이가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바리새인들처럼 섬기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1. 종교적으로 훈련된 사람들
그들은 어려서 부터 성경을 암송하고, 많은 종교적 규례를 몸에 익힌 사람들입니다.
"나는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행 22:3)
그 러므로 그들의 삶에서는 자연스레 종교적인 언행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복된 훈련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삶의 스타일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섬기는 자도 영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지 혼을 훈련시켜서 섬겨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훈련된 사람은 만들어진 제품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낳아진 자들인 것입니다.
2. 외식하는 자(겉을 꾸미는 자)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외식이란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할 때도, 구제하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만은 남에게 보이려고 오래 한다."(눅 20:47 공동번역)
우 리가 말을 할 때든지, 행동을 할 때,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여 하는 것은 진실을 숨기고 위선으로 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 앞에 좋게 보여서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자, 외식자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쇼(show: 보여주다)"인 것입니다.
교 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참된 교제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오픈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진실한 친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친교를 통하여 생명이 흐르는 곳입니다. 진실한 마음의 교류가 없이는 생명이 전달 될 수 없음으로 영적인 유익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영교하고자 하는 교회원들은 자기를 진실하게 열어 보여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
엄 격한 종교적 계율 속에서 훈련된 저들은 외적으로 볼 때 허물이나 실수 같은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이 되기가 쉽습니다. 인간은 행위를 보기 때문에 겉으로 볼때 별로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신앙심도 좋다고 생각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 러나 자기 의는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서는 허물이나 실수 같은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무흠한자, 의로운 자들로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 소지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으로써 그러했다고 자인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 3:6)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런 사람들의 외식과 자기 의가 훤히 들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위로 지키다가 이런 자기 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자 기 의를 세우는 데 급급해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행위를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만일에 마음을 고치지 않고, 올바른 행위를 하기 위해 노력만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며, 외식이 될 뿐인 것입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마음을 고치는 것 역시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통회와 낮아짐, 그리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님의 은사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를 입음으로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4.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거나 정죄하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바 리새인들은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를 높이고 세리들을 은근히 경멸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신약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의로운 줄 알고, 허물과 실수가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모 든 인간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결코 경멸과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고 해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라고 해서 경멸하고 업신여긴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 그것은 우리가 재판 자가 되겠다는 뜻인데 야고보는 다음과 말했습니다.
"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1-12)
우리는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할 뿐인 것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5.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자 기가 의로운 줄 아는 자들은 필경 최악에 치닫게 되어집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을 줄로 기대하고 있다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오지 않고, 죄인들에게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 대들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형이 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를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아들이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
이 큰 아들은 자기보다 엉망으로 살았던 동생을 용서하고 사랑과 은총을 부어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또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자만하는 종들이 주인에게 불만을 토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2)
예 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무상으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율법적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결국 이렇게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은 다른 것입니다.
바 리새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바리새인도 구원을 받기를 바라십니다. 그 예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사울이었을 당시 자기 의에 도취되어 펄펄 끓는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고 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은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옛날 바리새인 시절 같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그 때는 자기 의에 빠져서 결코 자신이 죄인이라고는 안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니라."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죄인인줄 알아야 예수님에게 나갈 수가 있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기에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율 법은 구원을 받는 데 무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발견케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면 물 있는 곳으로 가서 씻어야 하는 것이지 그 거울을 가지고 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속죄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그 러므로 율법적 행위를 중단하고 먼저 그리스도께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죄를 받고, 거듭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후의 모든 신앙생활은 성령을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칭 의롭다 하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인식하고 <통회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 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 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이것이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