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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노인들

작성자김정수|작성시간06.07.06|조회수389 목록 댓글 0
노인들

기형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는 그의 아름다운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중략)"

희망을 말하고자 했으나 결국 그의 의지는 '그러나'에서 멈춘다. 그가 가진 희망의 이면에는 '그러나'라는 '황량함'이 숨겨져 있다. 역사적인 인간(현대적 인간)으로서 우리는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통의 당위성은 그것이 이후 도래할 '낙원'의 예비 단계라는 점에서 성립된다. 즉, 지금의 고育?낙원으로의 필연적인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것이고 또 견딜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런 '사고'를 잊어버린 우리들은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희망인 셈이다)를 잃어버렸다. 삶은 유한하다. 영혼도 유한하다.'감당하기 벅찬' 날들이 지나가고 봄이 와도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봄의 빛은, 기형도에겐 그 '빛'마저 추악하다. 그 긴 겨울보다 두려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봄'이다.


그러나 기형도는 시작메모에서 '언젠가는'이라는 거의 유일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아닌가? 다만, 그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이 그의 시에서는 불확실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그는 '언젠가는'과 '그러나' 사이에서 오랫동안 헤메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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