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나는 나비>
박덕규
나비가 떼가 날아간 자리
허공에 긴 뱀 같은 자국이 남는다.
늦게까지 놀다가
내 이마에 앉았다 가는 나비도 있다.
나도 나비를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간다.
긴 골목길을 따라가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도
골목길이다.
길을 비켜 달라는 자전거 소리
채소 팔러 온 리어카
몰려다니는 동네 아이들
시장 갔다 오는 아낙네
그 사이를 나비가 가고
내가 간다.
때로 골목에는 나비와
나비를 좇는 나밖에 없다.
내가 날고
나비가 날 좇는 때도 있다.
골목이 일어나 나비를 좇고
내가 긴 골목으로 드러누워 있기도 한다.
나는 없고
나비 떼가 긴 골목이 되기도 한다.
모퉁이를 돌아
나비가 날고
골목이 날고
내가 난다.
큰길은 안 보이고
골목길이다.
평론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교수)
“나비”와 “나비 떼”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나비 떼가 남긴 “긴 뱀 같은 자국”은 긍정적인 심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비천한 단면을 암시하는 형상이다. 나비 떼가 날아가지만 그것만으로 현실의 비속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비 떼가 날아가는 순간은 생명이 약동하는 이상적 상태가 되지만 그것이 사라지면 다시 황폐한 현실이 부각되는 것이다. 화자는 나비를 동경하고 나비 떼가 계속 날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화자는 아무리 걸어도 골목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퉁이를 돌아도/골목길”이라고 했다.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라는 김소월의 의식과 유사하다.
나비는 골목을 넘어 어디든 날겠지만 화자의 의식은 골목에 갇혀 있다. 그래서 화자에게는 나비 떼도 골목을 나는 것으로 인식된다. 골목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나비의 꿈을 꾸는 화자에게는 존재하는 형태가 나비와 자기 자신 뿐이라고 인식될 수 있다. 생의 지평이 넓게 확산되지 못하고 나비라는 한 점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의 현실의 세부들은 무의미하고 그래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의 환각 속에서 내가 나비가 되어 날고 나비가 나를 좇을 때도 있다. 나와 나비의 존재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골목이 나와 동일화되어 나비를 좇기도 하고 나비 떼가 골목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화자의 몽상 속에서는 나, 나비, 골목이 모두 동질적 기표가 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자가 아이의 상태에서 성장하여 골목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가리킨다. 스스로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유폐된 공간 속에 나비의 환상을 간직하겠다는 태도다. 그 이유는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대로 현실의 비속함, 황폐함 때문이다. 어른의 페르소나가 작동할 때에는 역사와 민족, 독립과 광복의 메시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황폐함이 자아를 누르면 그는 소년기로 퇴행하여 나비의 꿈을 꾼다.
그는 이러한 모순의 관계 속에 있다. 아직도 양편에서 돌이 날아오고 자갈밭과 시궁창에 그의 발이 머물러 있다. 현실의 환멸과 나비의 환각은 모순의 관계에 있는데, 환각이 있기에 그는 환멸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다. 환각은 환멸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요 아내의 보살핌이며 가족의 따스함이다. 환멸의 현실에 둘러싸여 골목에 유폐되어 있지만 나비의 환각으로 그는 비상의 꿈을 꿀 수 있다. “모퉁이를 돌아/나비가 날고/골목이 날고/내가 난다”고 그는 말했다. 언젠가는 “큰길”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환각이 시를 낳게 했으니 그에게 더 이상 미련은 없으리라. 그 시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니 창조의 보람 또한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