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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의 場

가인을 왜 살리신 것일까?

작성자月悟|작성시간11.04.25|조회수742 목록 댓글 0

창세기 4장을 읽다보면 필자는 오래전부터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2군데 있었다. 그것은 동생을 쳐죽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살리시기 위해 표를 주시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필자만의 의구심은 아닐 수 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해석상의 아포리아(난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에 입문한 지 22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러서 조금 운을 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물론 가인의 찾아 죽이려는 자가 누구인가는 이미 논한 바 있다. 다시 잠깐 되짚어 보면 가인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4)라는 기록에서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에 대해, 이단들과 사이비들(김기동, 이만희 등)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아담 이전의 사람들이 아니고, 또한 일부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가인 이전에 아담이 낳은 자녀들도 아니며, 또한 가인 이후에 태어난 가인의 형제들도 아니다.


많은 이들은 이를 유추하여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록 더욱 혼란만 가중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어줄 만한 단서는 "하나님의 표"에 있다. 즉 누가 하나님의 표를 보고 가인을 찾아 죽이려고 하는데서 놓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행12:23(헤롯을 죽인 천사); 왕하19:35-36(앗수르 군사 185,000을 죽인 천사); 삼하24:16(이스라엘 백성을 멸하는 천사); 겔9:6(이마에 표있는 자는 살리고 예루살렘 백성을 죽이는 천사); 출12:23(애굽의 장자를 멸하는 천사) 등의 예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한 가인을 죽이도록 명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天使들'이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처음이라서 납득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14절에 가인이 '무릇 나를 만나는 자'라는 말을 원문으로 보면 '콜 모츠이' 즉 '나를 찾는 모든 자'라는 말을 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LXX는 '파스 오 유리스콘 메' 곧 히브리어 '찾다', '만나다'라는 동사 '마차'를 '유리스코'(마7:7-찾으라 의미)로 옮겨 왔는데 이 역시 '찾다', '만나다'라는 말이지만, MT(맛소라텍스트)의 히브리어 마차나, LXX(칠십인역)의 헬라어 유리스코의 일차적인 의미는 '찾다'라는 말이다. 정태현, 강선남이 번역한 한글 '칠십인역 창세기'를 보면, 위 본문을 "당신께서 오늘 저를 땅의 표면에서 내쫓으시면, 저는 당신 얼굴로부터 몸을 숨기고 땅위에서 신음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저를 보는 모든 사람은 모두 저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조금은 자의적인 번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나를 찾는 모든 자'가 '저를 보는 모든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필자의 생각은 적극적으로 가인을 찾아 죽이려고 하는 의미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 의미가 반영된 번역이 없이, 단순히 "만나는 자"로만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가인 보다 앞서 아담이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나무를 지키도록 파송한 천사들 곧 "이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의 기록과 같이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은 모두 천사의 일종으로 이미, 파송받아 와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표 곧 印은 결코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겔 9장 기록과 같이 천사들에게만 통하는 '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었듯이, 또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보고 그 표가 그 소지자의 목숨을 살리는 표임을 분별할 수 있는 존재라든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찾아 죽이려는 아담의 후사 즉 가인의 장자성을 부정할 만한 단서를 성경은 일절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인을 죽이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로 보는 것도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논의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주제 곧 하나님께서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의아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0-12)라는 처벌을 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을 위해 표를 주셔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의미를 가진 가인을 용서하셨던 연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13절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곧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는 본문을 보면, 가인이 10-12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너무 중하다는 변명을 하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위 본문의 내용은 살인자 가인이라도 두려운 하나님 앞에서는 후회지심을 보였기 때문인데 위 본문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즉 '내 죄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오니'는 '내 죄벌'이 아니라 '내 죄악'이라는 말이다.

 

대체로 개역성경에서 '죄악' 혹은 '죄', '불의'라고 번역된 '아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만 총 228회가 나오며, 모세의 기록에서는 42회가 나오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죄에 대한 '형벌'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예컨데 모세의 42회의 기록을 보면 창15:16; 19:15; 44:16, 출20:5; 28:38, 43; 34:7, 9; 레5:1, 17; 7:18; 10:17; 16:21, 22, 17:16; 18:25; 19:8; 20:17, 19; 22:16; 26:39, 40, 43; 민5:15, 31, 14:19, 34, 15:31; 18:23; 30:15; 신19:15 등에서 '아온'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어디에서도 '죄의 벌'로 사용된 예가 단 한 곳도 없다.     

 

그런데 창4:13, 이곳에서만 '罪罰죄벌'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LXX은 아온'을, '원인', '이유', '관계' 등의 의미인 '아이티아'로 번역하여 정태현-강선남 번역 『'칠십인역 창세기』에 따르면 위 본문을 "제가 용서받기에는 저의 罪過죄과가 너무 큽니다"라 번역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罪過"는 오경 가운데 이곳에만 나온다. 일부 필사본에서는 아온에 대응하는 '죄'를 사용하였다."라 주를 달았다. 여기서 '罪過'란 '죄가 될 만한 허물'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배철현 역주의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에서는 위 본문은 "카인이 주님 앞에 아뢰었다. 제 죄가 용서받기에 너무 큽니다"라고 번역하므로 제대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MT나 LXX 그리고 옹켈로스 타르굼은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한글 개역성경이나 NIV(my punishment), KJV 등 다수의 현대 번역성경들은 하나님의 '처벌'의 의미인 '罰'로 번역하으므로 본문의 문맥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 손석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즉 


가인은 여호와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불평을 늘어 놓는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심판을 결코 곱게 승복할 수 없다는 그의 내심은 감추고 어찌하든지 그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첫째로 그의 벌이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솔직한 고백임에 틀림없다. 죄에 따른 벌이 결코 가벼울 수 없으며, 견디어 낼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 만일에 죄의 벌이 가볍고 견딜만한 것이라면 사람은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강의, (서울: 성경읽기사, 1993) 78).

 

이렇게 이방 성경해석자가 원문을 대조해 가며 그 단어의 용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들은 참으로 신중을 기해 번역에 임해야 한다. 필자는 위 손석태 교수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바 있어 그의 히브리어 실력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히브리어를 몰라 위와 같이 해석했다고는 보지는 않는다. 다만 일일이 원문을 대조해 가며 주석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원어의 의미를 직역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의역을 한다면, 때때로 본문이 매끄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뚱맞은 주석들이 난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위 번역에 있어 문제는 '미느소'라는 단어인데 개역성경은 이를 '견딜수 없나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또한 바른성경은 "저의 형벌이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라고 했지만, 이 말은 '들어올리다'라는 말의 '나사"'에, 'from', 'out of'의 전치사 '민'이 복합된 칼 부정사 연계형으로, '아온'과 '나사'가 만나 '죄악을 짊어지다'로 결국 '내 죄악을 짊어질 수가 없나이다'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위 본문을 번역하면 전체 성경의 내용은 물론 전후 문맥과도 정확하게 일치된다. 다시 말해 아벨을 죽인 파렴치한 가인이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자 즉시로 자신의 죄를 뉘우쳐 말하기를 "나의 엄청난 죄악을 견딜 수 없나이다"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처벌에 대해서 은혜를 구하게 된 것이다. 곧 "보옵소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도망하는 자가 될지라 나를 찾는 모든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던 가인이 떠돌아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또 자신의 큰 죄악을 앎으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위해 죽음만은 면케 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잠16:4의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는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가인을 살게 하신 이것은 대하33:10-13의 기록과도 흡사하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는 매우 많다. 

 

지금까지 논의는 필자가 가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그 문맥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취지에서 본 논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자신의 스승을 판 일로 핏값을 성전에 던져 넣고 나아가 목숨을 끊었던 가롯 유다라 해도 그리고 아무리 자신의 큰 죄악을 깨달았다고 해도 분명 가인은 하나님의 불택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히11:4; 요일3:12; 유11과 같이 악한 자이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 하나님께서 그를 찾는 자들로부터 그의 목숨을 보존하게 하신 것은 그가 비록 일시적이라도 그 자신의 죄악을 돌아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본문의 문맥은 크게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창4:12-15을 몇 곳을 수정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네가 밭 갈아도 아다마는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에레쯔에서 피하며 도망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나의 큰 죄악을 견딜수 없딜 수 없나이다,

보옵소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에레쯔에서 피하며

도망하는 자가 될지니 나를 찾는 모든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찾는 모든 자에게서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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