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말씀 / 요한복음 4:1-26
요절 /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에는 물이 포도주가 되거나, 눈먼 자가 눈을 뜨는 등 놀라운 표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런 표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한 여자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닫힌 마음을 열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며, 구원을 선물하는 ‘가장 큰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에게 병을 고치고 물질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은사는 없더라도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한 영혼이 참된 예배자로 회복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 이질적인 요소가 많은 상대와 어떻게 마음을 나누는지 보여주십니다. 앞선 3장의 유대 지도자 니고데모와는 다르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민족, 성별, 종교적 상처까지 높은 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벽을 어떻게 넘으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의 사역이 확장되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예민해졌습니다. 아직 고난받으실 때가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사마리아를 거쳐가면 3일, 요단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돌아가면 5~6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보통 사마리아를 피해 더 오래 걸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과 역사적·종교적으로 깊은 갈등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하여야 하겠는지라.’ 반드시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선택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동선이었습니다. 성과를 내는 사람은 시간을 아끼지만,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시간을 기꺼이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홀로 앉아 계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한 사람과의 인격적인 대화가 시작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때 물을 길러 오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신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십니다. “물을 좀 달라.”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면 두레박이 필요하니, 두레박을 가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부탁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물 요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화의 시작에서 자신을 ‘요청하는 자’의 자리에 두셨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대화를 시작할 때 주도권을 쥐려 합니다. 특히 신앙 대화에서는 내가 더 옳고 더 많이 안다는 태도로 시작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화를 여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당시 문화에서는 남자가 공공장소에서 여자와 대화하지 않았고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벽을 넘으십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 앞에서 그런 요소들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여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다. 여인은 물을 얻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물을 달라고 하신 분이, 사실은 여인의 인생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내가 어떻게 하겠다,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에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중심에 두고, 여인의 이슈를 따라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럴 때 여인도 대화를 이어갈 이유를 느꼈습니다. 강요가 아니라 공감이 있었고, 논쟁이 아니라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과 반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가장 마지막에 드러내시는데,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기독교인인데”, “말씀공부 해보자”는 의도를 쉽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상대의 이슈에서 출발해 은혜를 충분히 느끼고 체험하도록 이끄시지만, 우리는 결단과 수용을 먼저 요구하며 대화를 급하게 끝내려 합니다. 지금 청년들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으로 쉽고 빠르게 정보를 수집해 온 ‘디지털 원어민’입니다. 생각의 속도도, 정보 접근 방식도, 관계를 여는 방식도 과거와 다릅니다. “나 떼는 말이야” 식의 과거 경험과 권위로 밀어붙인다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한다면 오히려 관계의 문을 닫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는 대화를 이어갈 이유를 느끼지 못하여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대화법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을 압박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목마름을 가지고 이야기하십니다. 대화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십니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여인의 소원이 점점 커지도록 이끄십니다. 단번에 바꾸려 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대화하며 그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자는 이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 물 길을 그릇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조상 야곱이 준 이 우물보다 더 나은 물을 주신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질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이 침묵하지 않고 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대화는 나의 열정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대화의 이슈에 스스로 열정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인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될 사람도, 그 물로 인해 삶이 달라질 사람도 바로 이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이것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네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말씀하시고, 여인의 삶의 중심에서 생명이 솟아나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의 인생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럴 때 여인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인격적인 말씀이 감동이었고, 자기에게 실제로 유익이 되는 말씀이 감동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먼저 살펴야 하고, 들어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들으시며, 여인의 이슈를 정확히 파악하셨고, 그 이슈에 맞는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화법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복음의 전달 방식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이 요청합니다. 그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여인이 마음을 열고 스스로 구하기까지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곧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우리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더 이상 목마름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대화의 이슈가 이제 영적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이슈로 받아들이자, 예수님께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말씀은 여인을 부끄럽게 하거나 몰아세우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인생을 이해하시고, 그가 회복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할 지점을 다루십니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 하십니다.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가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지만 “왜 그렇게 살았느냐”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 거짓말 하느냐”고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인정해 주시고, 그의 말을 “참되다”고 받아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이해받고 있고, 존중받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을 대하는 여인의 자세가 바뀌었습니다. 그녀가 기대하고 바라던 대상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기대 지점에서 여인을 만나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에서 주님을 체험하고, 그 자리에서 마음이 열립니다. 이제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제 여자는 마음 깊이 간직해 왔던 영적인 소원을 꺼내 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원래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진실하게 예배드리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속한 사회는 예배 문제로 오랫동안 혼돈과 상처를 겪어 왔습니다. 예배의 장소를 둘러싸고 유대인들과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어디서 예배해야 합니까?”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꺼낸 이슈를 존중하시고,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자상하게 또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21–2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예배의 정의를 새롭게 알려주십니다. 예배의 핵심을 장소의 문제에서 대상의 문제로 옮기셨습니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드리느냐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의 방식도 가르쳐주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특정 형식이나 이해관계, 전통적 우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진리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여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여인은 특정 장소에 얽매이지 않아도 됩니다. 정치와 종교 갈등에 끌려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논쟁의 장으로 끌고 가지 않으시고, 예배의 본질로 이끄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의 심령은 점점 더 영적인 소원으로 가득 차 올랐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여인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메시야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풀어 주실 분’이었습니다. 인생의 혼란, 참된 예배의 기준, 삶의 갈증을 해결해 줄 분이 바로 메시야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기대의 지점까지 자연스럽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이 준비되었을 때, 여인의 질문이 무르익었을 때, 여인의 영혼이 예배의 자리로 향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그 메시야이심을 밝히십니다. 저는 상대방이 성경말씀을 단숨에 받아들이고 서둘러 결단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저의 성급함이 오히려 상대의 마음 문을 꽁꽁 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럴 때, 구원의 주 예수님, 생명을 살리는 귀하고 귀한 복음을 전해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배워야합니다. 예수님은 성급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이고 점진적인 대화를 충분히 하시고 주고 싶었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를 마지막에 전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이 담긴 대화를 통해 메시야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난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변화는 예수님과 한 영혼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대화가 여인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되었든, 어떤 상황에 있든 예수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계시가 완성된 지금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마음을 열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 속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메시야를 만난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기도입니다. 내 속의 생각은 종종 우리를 불안과 번민, 두려움과 염려 속으로 끌고 가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말씀을 기초로 기도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상처 많은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시며 그녀의 그리스도가 되어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와도 이같이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해 절망하고, 고독 속에서 낙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면 되는데, 그 대화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받고 구원 얻은 우리는 예수님의 대화법을 배워 이 시대에 예수님의 방식으로 대화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대화법을 공부하면서도 잘 따르지 못할까요? 한 가지 이유는 내가 이미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전 방식대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성과를 얻은 경험이 쌓이면, 체험과 공감 없이도 압박하는 태도를 쉽게 정당화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법이 성경적입니다. 성경대로 할 때 지금도 말씀은 역사하고, 한 영혼의 마음을 열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을 잘하는 일, 상대를 잘 설득하는 일로 생각하지만, 핵심은 상대방의 이슈를 존중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밥을 사주고 기다려 주는 섬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에 아파하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행복과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대화할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예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형제와 이웃, 내 자녀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듣는 사람 중심으로 대화하고, 듣는 사람을 이해하며, 그 마음의 행로를 따라 필요한 말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대화하며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목자로 잘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나 중심의 대화법을 내려놓고, 성경말씀이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대화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화하셨습니까? 첫째, 상대방을 높이시고, 그 사람이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둘째, 그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정죄하지 않고, 그 사람 편에서 이해하며 존중해 주셨습니다. 셋째, 상대방이 예수님을 단계적으로 체험하고 은혜를 맛볼 수 있도록 기다리며 이끄셨습니다. 넷째, 그렇게 마음이 열리고 소원이 자라난 다음에야 복음의 메시지, 구원의 주 예수님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이질감을 가진 어떤 누구라도 마음 문이 열리고, 그 마음에 복음이 담겨 참된 예배자로 회복되는 역사가 지금도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의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서 ‘살아나는 대화, 살리는 대화’를 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잘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