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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 7 강 메시지_아산UBF

작성자서 아브라함|작성시간26.03.23|조회수72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제 7 강 메시지_아산UBF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 마태복음 5장 17~48절  

요절 : 마태복음 5: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말씀은 '천국 시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중심 질문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입니다. 행동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일으키는 마음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조항이 아닌 율법이 태어난 자리—하나님의 마음과 뜻—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다루시는 여섯 가지 율법조항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해치고, 이용하고, 짓누르는 방식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행동을 유발하고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과 그 뿌리를 다루십니다. 천국 시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자하며 이웃을 자기 유익과 자아실현 위한 도구로 삼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만 그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살인하지 않았지만 형제는 경멸했고, 간음하지 않았을지라도 여성을 자기 유익과 쾌락을 위한 도구로 보았으며, 맹세를 지키는 척하면서 지킬 수 없는 말을 남발했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오늘 말씀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제1부  율법의 완성—행동이 아닌 마음의 중심 (17~20절)

▍ (1)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세리와 식사하고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치는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에 신경쓰지 않는 분이거나 율법준수를 파격적으로 깨는 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완전하게 하다(πληρόω, 플레로오)'— 이 말씀은 율법이 답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다는 선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으며 길을 알려주는 지도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가리키는 목적 자체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율법 조항의 외적 준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분의 성품—공의와 사랑과 거룩함—이 하나님 자녀들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율법의 근본 정신을 마음으로까지 이해하고 갖는 것입니다.

▍ (2)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바리새인의 의(義)가 실패한 이유는 중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가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고 의롭게 보이려는 동기'가 있어서 입니다. 그들의 율법 준수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과정에서 약한 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마 23:4).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이웃들에게 ‘봐라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내세웠고 ‘너희는 이렇게 하여야 한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더 나은 의'는 동기의 변화, 마음 중심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도를 순수하게 하고 이웃에게 짐이 되거나 이웃을 이용하는 것을 그 의도와 뿌리에서부터 끊어내는 것—그것이 천국 시민의 의입니다.

율법은 '하지 말라'는 경계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응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여섯 가지 구체적 상황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제2부  마음의 뿌리를 다루시는 예수님 (21~47절)

 예수님은 '옛적에 이르기를…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ἐγὼ δὲ λέγω ὑμῖν)'라는 반복 구조를 통해 여섯 가지 대비를 말씀하십니다. 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직접 해설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각 경우에서 원칙을 드러내십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짐을 지우거나 이용하는 것은, 그 행동의 원천인 마음의 의도와 뿌리에서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 분노와 경멸—사람을 짓누르는 마음 (21~26절)

"옛 사람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리라"  마 5:21~22

 '라가(Ῥακά)'는 아람어로 '텅 빈 머리, 멍청이'를 의미합니다. '미련한 놈'이라는 표현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언어가 살인의 씨앗임을 선언하십니다. 경멸은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람을 죽인 적 없다. 내가 사람을 때린 적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을 존엄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하하고,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가 무섭게 그것을 근거로 그 인생 자체를 무시하고, '이 사람은 가치가 없어' 판단해 버리는 것—그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죄입니다. 경멸과 경멸에 기초하여 발산되는 분노는 내가 저 사람보다 위에 있다는 우월의식에서 나타나는 인간경멸과 오만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짓누르는 죄입니다. 

  23~26절에서 또한 예수님은 예배의 자리와 화해의 관계를 연결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러 오다가 형제가 나에게 원망이 있음을 생각하면, 예물을 두고 먼저 화해하고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짓누르거나 방치한 채로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짐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2) 음욕—사람을 도구로 삼는 시선 (27~30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간음은 정한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제로 보시는 것은 간음의 근본 바탕에 있는 문제, 인간을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나쁜 관점입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본다(ἐπιθυμέω)' 이것은 이성을 대할 때, 이성의 영혼과 그 존재의 인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오직 나의 쾌락을 위한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 인생을 자신의 쾌락 충족의 도구로 보는 것이 간음의 출발입니다. 이 문제는 성(性) 문제에만 국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더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고 자기 욕심충족의 도구로 보는 모든 시선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을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부터 귀를 열어서 이 예수님의 말씀과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하여 학생들을 많이 모아 과시하고자 하는 것, 행사에 자기이름을 낼 수 있도록 다른 소속 사람이라도 데려와 보여주기 하는 것 이런 것도 사람을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만드는 입니다. 사람을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과 이런 짓에 동원하는 것은 여성을 자기 쾌락의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음란, 간음 프로세스와 구조가 같은 것입니다. 이성의 존재를 자기 즐거움의 수단으로 보는 데서 출발한 간음은 파괴적인 결과가 대단히 심각합니다. 자기 몸에 죄를 지은 것은 기본이며 각각의 배우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거기에 더하여 각각의 당사자에게 자녀들이 있다면 그 자녀들에게 깊은 아픔을 남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신의 쾌락과 만족의 도구로 보는 사람은 자기 죄가 불러오는 이런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보지 않는 사람이기에 책임이 큽니다.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느라 그 사람들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모아서 자기 성과를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  영혼들을 행사나 이벤트에 동원하여 자기를 과시하려는 사람,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갈망하며 다른 사람 자체에 무심하고 이해가 없이 이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똑 같습니다. 자기 입장, 자기 변명, 자기 합리화만 잘하지 다른 영혼의 고통, 다른 인생의 상처는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보는 관점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자를 향하여 음욕을 품고 보는 시각부터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철저히 회개하여야 하는 것은 여자를 포함한 사람을, 우리 양들을 자기 즐거움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발상 자체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자기를 위한 병풍처럼 여기고 나를 이해해주고 관심 가져 주는 존재로 여기는 그 시도 자체부터 회개하여야 합니다. 

 29~30절의 '오른 눈을 빼어 버리라, 오른손을 잘라 버리라'는 대단히 강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그 욕망과 욕망을 불러오는 관점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강조합니다.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것보다 그 욕망으로 인해 영혼이 망가지는 것이 훨씬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타협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도구화하는 시선과 의도는 분명하게 끊어야 합니다.

간음의 본질은 '나의 쾌락과 필요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하든지 말든지 저 사람을 사용하겠다'는 자기중심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 만드셨지, 수단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양들을 대할 때, 자매님들을 바라 볼 때,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즐거운 것이나 내가 얻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중심의 동기, 나의 마음의 뿌리를 정확하게 보십니다.

(3) 이혼—약자에게 짐을 전가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1~32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혼은 남성만이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혼 증서는 버려지는 여성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모세가 허용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습니다(신 24:1~4). 그러나 예수님 오신 당시에 와서 이 제도는 남성이 아내를 편의에 따라 처분하는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혼 문제에서 지적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편의와 자아실현을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배우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를 건네는 행위는 법적으로는 깔끔해 보이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경제적, 영적 상처가 대단히 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증서 써서 내쫓는 그 악한 의도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본질을 회복하십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이 된 언약(창 2:24), 그 언약은 나의 편의나 자아실현이 침해받는다고 느낄 때 파기할 수 있는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신의와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맺은 한 영혼과의 언약적 신실함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이혼 문제의 뿌리 역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수렁으로 밀어넣더라도 내가 더 행복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4) 맹세—언어로 이웃을 조작하는 의도 (33~37절)

"또 옛 사람에게 이르기를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 5:33~34,37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맹세는 구속력이 약하다는 논리가 통용되었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은, 필요하면 지키지 않을 여지를 남겨두면서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심어주는 교묘한 언어 조작이었습니다.

 이런 짓은 이웃으로 하여금 나를 신뢰하게 만들어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나를 믿어라'는 신호이지만, 말장난, 언어 조작에 동원될 때 그것은 이웃을 이용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웃은 맹세까지 하는 말을 믿고 의사결정을 합니다. 이런 이웃의 믿음을 악용하는 것은 이웃을 속이는 것이며 심각한 짐을 지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맞으면 옳다고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여야 합니다.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 진실을 말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 그리하여 맹세가 필요 없는 사람—평소의 삶이 투명하고 신뢰할 만해서 굳이 어떤 맹세나 보증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이 나의 말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말이 이웃에게 짐이 아니어야 합니다.

언어 조작의 뿌리는 '이웃에게 신뢰를 주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이기심입니다. 하나님은 내 말의 바닥에 있는 의도를 보십니다.

 '곧 할게요', '꼭 하겠습니다'라는 말들이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고 있습니까? 목자는 말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과중심의 목자는 반드시 말이 다릅니다. 이 때는 이렇게 말했는데 저 때는 저렇게 말합니다. 성과에 마음이 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전에 하던 말과 지금의 말이 다릅니다. 이득이 될 것 같을 때 하는 말과 짐이 되고 어려울 때의 말이 다릅니다. 성과중심적이고 사람들 속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가 시시때때로 말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인생의 방향이 오직 주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말에서도 믿을만 하고 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5) 보복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8~39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은 원래 과도한 복수를 제한하는 공정한 법이었습니다. '눈에는 눈'—그 이상의 보복은 하지 말라는 것이 본래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정당한 보복의 권리'로 이해되었습니다. '나도 당했으니 갚을 권리가 있다.'

 예수님은 이 정당한 보복의 논리 자체를 거부하십니다. 보복은 또 보복을 낳고 그 보복은 또 보복을 낳습니다. 보복은 악의 연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악으로 갚으면, 상대방은 더 큰 악으로 갚습니다. 그 연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것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닙니다. 왼편을 돌려 대는 것, 겉옷까지 주는 것, 오 리를 더 가는 것—이것들은 모두 악의 논리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논리,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웃에게 짐을 주지 않는 것을 넘어, 이웃에게서 받은 상처와 억울함을 '갚아야 할 빚'으로 계산하지 않는 마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가해진 불의를 하나님께 맡기고, 스스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을 선택합니다(롬 12:21).

보복의 뿌리는 '나의 상처와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자기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자아를 내려놓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결단입니다.

(6) 원수 사랑—하나님을 닮는 사랑의 완성 (43~47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3~45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이 두 번째 구절은 구약에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 계명을 '같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축소 해석하면서 자연히 따라온 논리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에만 적용하는, 사랑을 자기 유익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경계를 무너뜨리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것은 감정적 호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헬라어 ἀγαπάω(아가파오)는 상대방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의지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자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45절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방의 자격을 조건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이 실제로 흘러나올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즉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46~47절은 질문합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을 '나의 자아실현과 정서적 안정을 위한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조건부 사랑의 뿌리는 '나에게 유익이 될 때만 사랑한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원수를 위해—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위해—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3부  '하늘 아버지처럼 온전하라'—천국 시민의 정체성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온전하라(τέλειοι, 텔레이오이).' 이 단어의 어근 τέλος(텔로스)는 '목적, 끝, 완성'을 의미합니다. '완전해지라'는 도덕적 완벽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위해 의도하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온전함'은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은 그 기준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두십니다. 인격적인 아버지를 닮는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자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볼 때 닮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완전히 드러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그 삶을 따르는 것—이것이 온전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천국 시민의 정체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 시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 중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고, 이웃을 이용하는 것을 막으며, 이웃에게 짐을 지우는 것을 막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에서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일으키는 의도와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이루어지도록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으로 주십니다.

 

결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중심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48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를 충만히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섯 가지 율법 조항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체적인 길을 가르치십니다. 분노와 경멸은 이웃의 존엄을 짓누르는 마음입니다. 음욕은 이웃을 나의 욕망 실현의 도구로 삼는 출발입니다. 이혼의 남용은 자기 편의를 위해 약자에게 짐을 전가하는 선택입니다. 맹세남발은 신뢰를 이용하여 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입니다. 보복은 악의 악순환을 불사하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조건부 사랑은 나의 자아실현을 위해 관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의 공통 뿌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 자기의 욕망, 자기의 편의, 자기의 이익, 자기의 자아실현이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웃은 그 수단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삶의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죄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가 된 우리—를 도구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양들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짐을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이신 이유는, 율법이 가리키던 그 사랑을 그 몸으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중심에 가진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이웃을 해치지 않고, 이웃을 이용하지 않으며, 이웃에게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그것이 행동이 아닌 의도와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늘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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