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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 17 강 메시지_아산UBF

작성자서 아브라함|작성시간26.06.15|조회수40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14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마태복음 17강)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본문 : 마태복음 11:1-30
요절 :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시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문제도 많았고 문제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눈 앞에 있는 것과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 계시다고 해도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배워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초청'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허물과 죄로 인한 수고를 벗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대로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1.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1–19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11:2-3)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를 잡아 가둔 것입니다(14:3).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낸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삶을 살며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온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고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영적인 타락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회복이 가능한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하실 일 중에서 심판과 징계에 대하여 개인적인 관점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2). 세례 요한은 주변 상황과 시대를 보면서 심판의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시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위대한 세례 요한도 자기 개인적인 관점을 혼합시킬 때 어려움을 겪습니다. 누구라도 개인적인 관점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관점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법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4-5)

이사야 35:5-6과 61:1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말씀을 기초로 '이사야가 말한 그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법은 성경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한 메시아관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 현재 상황을 보는 관점을 말씀에 기초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안에 있다고 자부하기만 하고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관점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세례 요한 같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보는 것은 우리가 언제든지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관점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 소감을 작성하고 서로 발표하며 나누는 것도 우리가 성경에 기초한 관점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사람에 대한 관점, 세상에 대한 관점, 사건과 상황에 대한 관점이 올바른 것에서 출발합니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 예수님은 우리가 보는 관점과 다른 모습이 많으십니다. 더 높고 더 위대한 모습과 본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차원적으로 단정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 자체에 대한 신뢰가 지속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나의 관점으로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려는 시각을 버리고 변함없는 신뢰를 예수님께 고정하여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1:11)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메시야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 세상에 대한 심판에 관한 개인적인 관점에서 조금 문제를 노출하였지만, 세례 요한은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닙니다. 선지자보다 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대함의 기준은 예수님을 얼마나 아는가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 이전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이런 분이 오실 것이라며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보고 알면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은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천국이 도래하여 확장되는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열리는 새 언약의 시대—가 얼마나 위대한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문앞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나라를 맛보는 모든 성도는 구원의 충만한 빛 안에 있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하십니다. 말라기 4:5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다른 아이들에게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6-17)

예수님은 그 세대를 장터에서 응답하지 않는 아이들로 비유하십니다. 요한이 금식하며 엄격하게 살자 귀신 들렸다 하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자 먹기를 탐하는 자, 죄인의 친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자의 태도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절). 당장의 평판, 당장의 사람들의 말은 오류가 많은 법입니다. 그렇지만 지혜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진리를 증명합니다.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예수님의 사역은 열매로 증명됩니다. 

2.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 (20–24절)

21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1)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향하여 책망 하십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 도시들은 갈릴리 지역의 도시들로서, 예수님의 많은 기적이 행해진 곳입니다. 이 도시 사람들은 회개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사람들이 세운 도시들입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바알숭배를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이 바알숭배의 본거지 사람들이 차라리 심판날에 가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더 관대한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빛이 더 많이 주어진 곳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큰 특권입니다.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11:23)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거지였습니다(4:13). 가장 많은 기적을 보았고 가장 많은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은혜입으면서 인간적인 교만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자신의 특권에 안주하며 회개없이 오만한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말씀 많이 들었다고 자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종하여야 합니다. 많이 안다고 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는 날이 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5)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종교적 능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진리의 주 예수님은 감추어졌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알아보느냐 관건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배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7)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학식이 높아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누구든 예수님을 통하기만 하면 아버지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이나 자기의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집중하여야 합니다. 

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28–30절)

28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계시가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짐을 선언하신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은 지쳐서 탈진할 때까지 이른 것을 말합니다. '무거운 짐을 진(πεφορτισμένοι)' 것은 과중한 짐을 메고 있는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무거운 짐'은 수백 가지 율법 해석과 규정들이었을 것입니다. 열심당원들 유대민족주의자들에게는 바뀌지 않는 로마제국의 지배구조일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각 개인들은 주변환경으로 인한 짐, 관계에서의 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여러 사건들이 주는 짐들을 지고 있습니다. 상처도 있고 미움도 있고 낙심도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짐 진 채로, 지친 채로, 그 상태로 오라고 하십니다. .

 29–30절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29-30)

예수님께서 멍에를 같이 메자고 하십니다.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χρηστός, chrēstos)', 예수님의 짐은 '가볍습니다(ἐλαφρός, elaphros)'. 당시 랍비 전통에서 '멍에'는 율법, 교사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시는 것은 새로운 스승 예수님의 길로 오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배우라'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은 온유(πραΰς)하고 겸손(ταπεινός)하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 앞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와서 배우는 사람이 얻는 복에 대해서도 약속하십니다. '마음의 쉼(ἀνάπαυσιν ταῖς ψυχαῖς)'—은 영혼 깊은 안식입니다. 이 쉼은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멍에 아래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침과 고갈과 공허함과 불안은 예수님을 찾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인생의 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세례 요한도 약간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께서 모든 짐 진 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을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본질적으로 수고와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바라보거나 상황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쉼이 없고 고달픈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울 때 누구든지 새로운 힘을 얻고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왕의 위대함은 그가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서가 아닙니다. 악기를 잘 다루고 노래를 잘 불러서도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잘 될 때에도 하나님을 찾았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자신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심각한 죄를 지어 절망 스러울 때에도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그는 노래하였습니다. 시편 51편은 죄 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심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잘할 때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잘 못할 때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깊이 연구하고 예수님의 삶과 교훈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님을 배울 때,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비밀을 알고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초로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임을 깊이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으로 가서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오늘 다시 시작하는 주의 종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제 것을 잊어 버리고 날마다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푯대로 삼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배우고자 할 때 그는 날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지치지 않았으며 낙심도 없었습니다. 다윗 왕도 항상 하나님 앞으로 갔을 때,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앞으로 가서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힘차게 살아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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