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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 3 강 메시지_아산UBF_이모세목자

작성자서 아브라함|작성시간26.02.23|조회수52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제 3 강 메시지_아산UBF_이모세목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말씀/ 마태복음 3:1-17

요절/ 마태복음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우리는 저마다의 계획과 기대를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스펙을 쌓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씁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네가 누구인지 보여주라’ 재촉하며, 눈에 보이는 성취만이 정답이라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진정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에 순종하며, 진정한 인생의 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깊이 있게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죄인 중 하나가 되셔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겸손과 대속의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 삶의 현장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성전은 종교적 형식주의와 정치적 부패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시선이 화려한 건물이나 인간적인 권위에 머물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외침을 통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십니다. 광야는 세상의 증명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여기서 회개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감정적 후회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삶의 방향은 고치지 않은 채 같은 죄를 반복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천국이 문 앞에 왔는데 여전히 내가 왕 노릇 하는 옛 자아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회개는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슴 아파하며, 내 삶의 목적지를 나의 영광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된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통치를 영접하는 순간, 삭막한 광야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이미 문 앞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완벽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무력함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다가오는 선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내려 애쓰는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존재의 변화가 회개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삶의 방향을 세울 때, 우리의 삶에는 의지적 노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평안을 누리고 긍휼의 마음으로 기꺼이 수고를 감당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건을 지켜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3절에서 4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전파하는 메시지와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그저 ‘소리’라고 정의합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나면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요한은 타인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겸손한 소리가 되었습니다. 광야의 밤은 뼈를 깎는 추위가 있고 낮에는 타는 듯한 열기가 있습니다. 약대 털옷은 부드러운 직물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여 피부를 자극하고 메뚜기와 석청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분만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고된 삶을 자처하며 광야에서 외친 것은 그의 사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그는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제사장의 아들이었음에도 광야의 거친 환경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공급에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으나 그의 메시지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기교가 아닌,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6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의 외침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광야로 사방에서 구름 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교통도 불편하고 인테리어가 예쁘거나 사진 찍기 좋은 곳도 아닌데 역대급 오픈런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광야로 나아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 유대 사회는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던 영적 기갈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감에 지쳐 있었고, 영혼을 울리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사자처럼 외치는 요한의 메시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했습니다. 그 음성 앞에 서자, 감추어 왔던 자신들의 추한 죄악이 복음의 빛 아래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요한의 설교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살았던 지난날의 죄를 낱낱이 인정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세례는 보통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방인들이 ‘나는 이제 과거의 부정한 삶을 죽이고 새로운 백성으로 태어나겠다’는 의미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이방인과 다름없는 철저한 죄인으로 인정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요단 강물 속에 자신들의 옛 자아를 장사 지내고, 곧 오실 메시아가 통치하실 천국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갈망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잠들어 있던 영혼들을 깨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진정한 회개의 물결을 일으킨 것입니다.

 7절에서 10절을 보십시오. 참된 회개의 물결이 요단 강을 덮을 때, 그 대열 속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당시 방황하고 상처받은 백성들을 돌봐야 할 목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영광과 특권의식에 빠져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목자가 있으나 목자 없는 것과 같았던 시대에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 말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에는 여전히 자기 영광이라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에 반응하여 죄를 자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요한의 인기에 편승하거나 혹시 모를 임박한 심판을 종교적 요식 행위로 피하려는 계산적인 태도로 나아왔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뉘우침이나 눈물 한 방울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변했다는 구체적인 증거, 즉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그들이 가장 견고하게 붙들고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과 혈통적 기득권을 정면으로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원은 과거의 전통이나 내가 속한 집단의 명성에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구원에는 심판도 따릅니다. 열매 맺지 않는 삶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인 것과 같은 절박한 위기 상황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반드시 찍혀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면 열매는 저절로 맺힙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도끼가 이미 뿌리에 놓인 이 시점에서 열매 맺는 삶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생사가 걸린 절박한 문제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강렬한 외침과 요단 강에서 일어난 회개의 물결은 유대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그를 따랐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며 그를 우러러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시선을 오직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께로 돌립니다. 그는 자신의 물 세례가 가진 한계를 명확히 밝힙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요한의 세례는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준비일 뿐,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키거나 죄를 완전히 씻어낼 능력은 없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를 향해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신발을 들거나 끈을 푸는 일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철저히 고백하며, 오직 그분만이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성령과 불”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요한의 물 세례와는 차원이 다른 본질적인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령 세례는 죽은 영혼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창조적 변화’이며, 불 세례는 우리 내면의 깊은 죄악과 불순물을 태워 정결케 하는 ‘강력한 성화’입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를 주는 스승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재창조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또한 주님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농부처럼, 알곡과 쭉정이를 철저히 구별하십니다. 키질은 바람을 이용하여 무거운 알곡은 안으로 모으고 가벼운 쭉정이는 밖으로 날려버리는 작업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바람 앞에 서면, 생명력을 가진 알곡인지, 속은 비어 있는 쭉정이인지가 드러납니다. 알곡은 하나님의 영원한 곳간에 들여지지만, 쭉정이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채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집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의 오심이 어떤 이들에게는 감격스러운 구원이 되지만, 깨어 준비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처럼 가벼운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의 세례를 통과하여 생명의 무게를 가진 알곡으로 다듬어지고 있는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방향과 열매를 통하여 증명될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권능의 주권자이자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실 준엄한 심판주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이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갈릴리부터 먼 길을 걸어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고자 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금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이 회개하기 위하여 받는 것인데 심판의 주체이신 분이 그 회개의 대열 속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높은 보좌에 앉아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죄인들 중에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시고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고통과 한계 속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수치와 절망을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 있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의 요청 앞에 요한은 사양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요한의 고백은 타당한 영적 질서이자 상식이었습니다. 어떻게 심판주가 심판받을 자의 줄에 서며, 주가 되시는 분이 종의 자리로 내려올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반응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메시아의 겸손 앞에 선 우리 모두의 당혹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당황하는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의’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죄의 대가를 누군가는 치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그 죄인의 자리에 서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대속의 길을 가기 위한 결단을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심판주가 오히려 심판받는 종의 자리에 서신 것은 장차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실 두 번째 아담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철저히 낮아지셔서 죄인인 우리를 살리셨기에, 이제 그분을 따르는 우리 또한 사명의 자리에서 동일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양들을 위하여 수고하며 내 논리와 자존심을 버리는 희생을 감당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의를 이루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내 권리와 감정을 앞세우는 논리를 버리고 주께서 맡기신 생명을 위하여 죄인과 같은 자리까지 낮아질 때 비로소 그곳에서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일은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감당하는 희생과 겸손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굳게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대속의 길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길이며, 그 사역이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확증입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평화, 그리고 그분이 가져오실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겸손히 낮아지고 희생의 자리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늘 문을 여시고 감당할 지혜와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낮아진 자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는 사명의 길을 감당하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친히 음성을 들려주셔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2장 7절의 예언대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메시아 왕이십니다. 이사야 42장 1절의 예언대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 받으실 여호와의 종이십니다. 또한 창세기 22장 2절의 이삭처럼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독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져 죽음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셨을 때, 그 순종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낮아짐과 대속의 길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의 권세를 뒤로하고 우리를 대신해 죽기 위해 오신 진정한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요 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멀리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수치와 고통의 현장에 직접 내려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의지할 때 진정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 또한 낮아짐과 희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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