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1일 주일 말씀메시지 (마태복음 제18강)_아산 UBF
이방의 희망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12:1-21
요절 / 마태복음 12:21 “또한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이니라”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며 모든 짐 진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12장은 그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의 적대감으로 시작합니다. 안식일 밀밭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율법의 참된 목적,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근원적 충돌입니다.
제1부 안식일의 주인 (1-8절)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절)
신명기 23장 25절은 이웃의 밀밭에서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그 일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해석은 탈무드에 기록된 39가지 금지 노동에 근거하였고,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 비비는 것은 ‘타작’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기준으로 세 가지 규정을 위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이유는 배고픔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느라 생업을 내려놓은 사람들이었고, 이 배고픔은 헌신의 흔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성경적 대답
첫 번째 대답: 다윗의 선례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3-4절)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을 인용하십니다. 다윗이 놉 성소에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쫓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 있었으며 늘 배고팠습니다.
두 번째 대답: 제사장의 선례 (5-6절)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5-6절)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번제를 드리고, 진설병을 교체하고, 할례를 행합니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이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성전이 가리키던 바로 그 실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성전이 예표하던 본체이신 예수님을 섬기므로 제자들의 행동은 정당화됩니다.
세 번째 대답: 호세아의 말씀과 결론 (7-8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7-8절)
예수님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십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 자체는 끊임없이 드렸지만 정작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애와 진실한 관계는 잃어버린 백성이었습니다. 다윗과 제사장의 선례가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규정 자체보다 그 규정이 지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형식이 되어 자비를 잃을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면 역시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창조주께서 안식을 제정하신 목적, 인간의 회복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안식일이 가리키던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제2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9-14절)
“거기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9-10절)
첫 번째 사건이 밀밭에서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면, 두 번째 사건은 회당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묻습니다.
손이 마른 사람은 오랜 세월 이 장애와 함께 살아왔을 사람입니다. 일할 수 없고, 사회적 참여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불쌍하고 고통받는 인생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1-13절)
당시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가축을 구출하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면,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당연히 옳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회복시키는 선언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그 선하심을 나누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라.”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한 손 마른 사람에게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창조 때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동일한 능력으로, 마른 손이 온전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더라” (14절)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을 보면서도 그것을 없애려 하는 모습은 죄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규칙이 사람보다 앞서고, 신앙의 방식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종교는 생명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표면적으로 볼 때 안식일과 성전은 유대교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유대 종교 시스템이 유지되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상대하려면 이 두 가지는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을 정면으로 재정의하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유대교의 중대한 사안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처럼 보였고, 바리새인들은 그 대응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시작과 과정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과만 보면 바리새인들은 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초대교회에는 적지 않은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참여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굳어지고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한 가지 관점은 율법 연구 자체에 몰입하다가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전문 집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다른 분석은 지나친 자부심과 자기의(自己義)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누가복음은 이들을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자들”이라 불렀습니다. 오랫동안 선한 일을 해 온 사람에게는 그 선함이 자기 정체성이 됩니다. 정체성이 되어버린 선함은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굳어지기 쉽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말하지 못하면 견딜 수 없고, 틀렸다는 지적을 받으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도 경건의 성공에 이른 집단이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이방 문화 속에서 신앙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고,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유일신앙을 지키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성공이 자기 우월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우월감에 빠진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면 누가 더 엄격하게 사는가, 누가 더 거룩한가를 두고 경쟁이 생기고, 그 경쟁은 경직성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자리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 대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의 그 참혹한 심판이 다시 찾아오면 어떻게 하는가, 또다시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더 엄격해야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더 세밀하게 옳은 말과 옳은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더 깊은 문제는 두려움 속에 서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심판을 받으면 어떻게 하는가, 다시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그들로 더 엄격한 규례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 규례를 지키려 애썼고,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두려움에서 시작되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신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점점 경직시키고, 경직된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제3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15-21절)
“예수께서 알으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거늘 그가 그들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니” (15-16절)
예수님은 죽음의 음모를 아십니다(헬라어 γνοὺς, 그노우스, “알으시고”). 알면서도 물러나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십자가의 때가 아버지의 시간표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러나시면서도 따라오는 무리를 다 고치십니다.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도 아픈 양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 하심이니 일렀으되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7-19절)
마태는 이사야 42장 1-4절, 첫 번째 종의 노래를 인용합니다. 이 종의 노래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시작점입니다. 조용히 낮아져 섬기는 종의 모습이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될 것을 보여줍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은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렸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마 3:17). 바리새인들이 음모를 꾸미는 동안 예수님은 조용히 아픈 자들을 고치시며, 소리를 높여 반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짐과 섬김과 침묵, 곧 십자가의 방식으로 세워집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0절)
온전한 갈대는 피리가 되어 음악을 만들고 쓸모가 있습니다. 상한 갈대는 부러져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고, 세상은 그것을 버립니다. 타오르는 심지는 빛을 내어 방을 밝히지만, 꺼져가는 심지는 연기만 내며 빛을 잃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심지를 불어 꺼버리고 새 심지로 교체합니다.
손이 마른 사람은 수십 년을 그 손으로 살아왔습니다. 세상이 볼 때 그는 상한 갈대였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논쟁의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회당 한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손을 내밀라.” 그 한 마디로 상한 갈대가 온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실 그날까지 상한 갈대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이니라” (21절)
“이름을 바라리라.” 소망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2장), 로마 백부장(8장), 가나안 여인(15장)처럼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언약 밖에 있던 우리도,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바라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8절)
안식일 규정이 가리키던 모든 것, 곧 하나님과의 화해와 피조물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안식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20절)
우리가 붙들고 돌아가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상한 갈대일 때, 내가 꺼져가는 심지일 때에도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붙드십니다. 십자가에서 이기셨고 부활로 완성하셨습니다. 그 승리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을 즉시 버리시는 분이 아니며, 넘어졌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약한 사람을 다시 세우시고, 꺼져가는 믿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규례의 기준으로 가늠하였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정죄하고 잘라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회복 가능하다고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규례였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를 끝까지 품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늘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지 못하면 누구든 바리새인들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항상 옳아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에는 경건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노력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자신도 다른 사람도 쉽게 용납하지 못한 채 점점 경직되고 판단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마음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때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부족함도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여서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참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삶 속에 실제로 적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참아줄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과 자기의로 살지 않고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율법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성품을 만날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생 율법을 연구한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였습니다. 반면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고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생 경직되지 아니하며, 예수님처럼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캠퍼스 지성인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더 넓고 더 큰 그리스도의 세계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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