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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27

작성자윤신숙|작성시간11.11.03|조회수45 목록 댓글 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 / 요한복음 11:1-27
요절 /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죽음이 예수님의 모든 것을 Stop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은 예수님께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죽음이 우리에게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근교에 베다니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살았는데 나사로라는 오빠가 있었습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큰 사랑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는 중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병들었다는 기별만 해드려도 예수님께서 즉각 조치해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일도 겪지만, 나쁜 일도 만납니다. 나쁜 일 중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마음이 슬픕니다. 근심 됩니다. 절망스럽고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통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일지라도 예수님께서 계시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살아 계시면 인간적으로 고달픈 일, 근심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랄 것이 아닙니다.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비켜가기만을 바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관점을 가지고 실생활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본래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솜씨가 좋고 섬기는 마인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일 중심이어서 자주 평안을 잃을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평안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성이 강한 자매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나사로를 깊이 이해하시고 그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해주시던 예수님께서 정작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에는 전혀 서두르지를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틀이나 더 계시던 곳에 머무시면서 나사로에게 가시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스스로 죽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에 위축되지 않으셨고 신경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사람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감히 극복할 대상으로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죽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막으려고 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음만큼은 피하셔서 언제까지나 자기들 곁에서 자기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이 예수님께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죽음을 피하시지 않으시는지 두려워하시지 않으시는지 장차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하시는지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죽음을 이기는 권세, 사망권세를 파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역사에 사랑하는 나사로 가정을 쓰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참으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2. 세상의 빛 예수님(7-16)

  7,8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사로의 가정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는 역사, 죽음을 극복하는 새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유대의 ‘유’자만 들어도 머리카락이 곤두섰습니다.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고 또 자기들을 돌로 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두려움의 근본은 죽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사단이 이용해 왔습니다. 유사 이래로 사단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끈으로 갖가지 유혹과 시험을 하였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어두움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온 세상과 사람의 내면에 어두움을 드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망이 드리운 이 세상은 빛되신 예수님 때문에 환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빛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빛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밝은 빛, 절대적인 빛, 생명의 빛이심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정말 어두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600년이나 지났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에 이어 지금은 강포한 로마가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유대에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갔습니다. 가난했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또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통치에 거스리면 가차없이 힘으로 눌렀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영적으로나마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던 것도 40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암흑기였습니다. 말씀이 없는 암흑기요 주권이 없는 암흑기며 헐벗고 가난한 암흑기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에 맞아서 죽을까 두려우니 가장 어두운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빛이 오셔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있으니 때가 낮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니 지금이 낮이요 그들의 삶이 낮이요 조금도 어두움이 없음을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어둡습니다. 세상이 어둡고 또 내 마음이 어두운 것은 빛되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함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어두움의 문제를 정치 지도자들이나 정치시스템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요즘은 정책 탓을 많이 합니다. 정책이 잘못 되어서 세상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 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진정한 빛이 되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정책이나 정치시스템이나 사람이 아닙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 뿐이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드디어 나사로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십니다. 잠은 다시 깨어납니다. 죽음은 다시 깨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는 죽음도 잠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죽음을 잠으로 보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잠자는 것이 나사로의 병을 호전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완전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빛의 역사가 시작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새역사가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 부활의 새로운 신앙을 심으시게 된 것을 기뻐하십니다. 가장 좋은 믿음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최상급의 부활의 믿음을 주시게 된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힘이 넘치십니다. 이제 부활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러 ‘그에게로 가자’ 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비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내면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용감해 보이지만 그 내면은 캄캄한 어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도마와 제자들의 내면을 환하게 밝히시러 베다니로 가십니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7-27)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오셔도 좀 일찍 오시지 나흘이나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흘은 중요합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영혼이 그 육체 근처에 사흘간 머무른다고 믿었습니다. 사흘간 머무르는 이유는 다시 육체에 들어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고 믿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라는 것은 이제 완전히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유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해주고 인간적인 위로를 해줄 뿐이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님을 나가 맞으며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의 말은 이제 오라비가 죽었으니 예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상황은 모두 끝났고 예수님은 너무 늦게 오셨다는 원망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조차도 죽음의 한계 아래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분인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마르다는 이제 모든 상황은 끝이 났고 다만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영혼과 남은 유족들을 위해서 위로나 해주시고 기도나 해주시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 사망의 세력 아래 있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이와 같이 체념적이고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조차도 원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십니다. 죽음은 역사 이래로 인간이 결코 정복하지도 이기지도 못하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요, 불가항력의 대표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인류 최대의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영웅호걸도 사람과 나라는 이겼을지 몰라도 죽음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제압하시고 죽음에 처한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십니다. 죽음의 권세아래 신음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인사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하는 예의이며 인사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유대인들은 인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이런 통상적인 인사를 유대인들은 주고 받았습니다. 사망의 권세아래 어두운 마음을 가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새역사를 선언하시는데도 그 귀하고 놀라운 말씀을 흔히 하는 인사정도로 이해하고는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게 말씀을 주십니다.

25,26절을 큰 소리로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십니다. 완전히 이기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파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을 직접 이루시고 성취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만 부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을 주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부활하게 하시는 부활의 주님 부활의 능력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셋째, 예수님은 생명 곧 영생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영원한 그리스도 영원히 살아 계시는 주의 주, 왕의 왕이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영생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풍성히 나누어 주십니다. 믿기만 하면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을 때 믿는 자가 얻는 축복까지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됩니다. 이는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나도 부활합니다. 예수 부활, 나도 부활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영원히 사는 것, 영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만을 보시고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영생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마르다는 이제야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렸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비로서 아나이다 신앙에서 믿나이다 신앙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였으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실질적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자에게 부활의 은혜는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실제 삶에서 믿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절망과 어두움과 사망의 권세를 믿음을 이기고 부활과 영생의 주역들로 쓰임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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