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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 : 28-57

작성자윤신숙|작성시간11.11.03|조회수12 목록 댓글 0

네가 믿으면

말씀 / 요한복음 11 : 28-57
요절 / 요한복음 11 :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우리의 인생에는 슬픔에서 나오는 눈물이 있습니다. 아파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의 연약함과 한계적인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슬픈 눈물 없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그를 어디 두었느냐 (28-37)

  28-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한 마르다가 집에 있는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를 만났던 곳에 계속 계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마리아의 집에 와 있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자 무덤에 곡하러 가는 것으로 짐작하고 따라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리며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빨리 오시지 않았다고 원망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위로하고 울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울어 주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동안 도움 받지 못했음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원망은 낙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낙심 끝에는 원망과 불평이 따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갖는 원망, 불평, 낙심, 슬픔, 눈물 이것들은 죽음을 배경으로 합니다. 죽음이 없다면 원망도 불평도 낙심도 슬픔도 눈물도 사라집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 흘리는 마리아와 그 자리의 유대인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동정이 아니었습니다. 분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 위에 왕 노릇하는 죽음으로 인해 분노하셨습니다. 인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죄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위에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생명의 주 예수님 앞에서조차 마리아와 유대인들은 죽음에게 지배당하며 예수님을 원망하고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왕노릇하는 그 모습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 보시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울은 것은 큰소리로 울은 울음이었습니다. 여기 35절에서의 예수님의 울음은 소리 없이 우는 것을 뜻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무덤에 누운 나사로를 깊이 사랑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오늘날 죽음 권세아래에서 슬프고 운명적인 모든 인생을 향한 거룩한 동정으로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겁을 내고 인생의 절망과 고통 속에 드러누워 있으면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십니다. 죽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인하여 눈물 흘리십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자 유대인들은 교만하고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흘리는 눈물을 보고 착각하였습니다. 거룩한 눈물조차 자기들이 흘리는 절망과 낙심의 썩은 눈물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교만한 유대인들은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비굴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인다 싶으면 비난하고 깎아내렸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사망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사는 유대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죽음을 늦게 맞이하게 해주는 것만이 인생의 가장 큰 가치라고 여깁니다. 그런 것을 해주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있는 부활을 알지 못합니다. 영생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나약하나 교만합니다. 이들은 부족하나 죄악 됩니다.

  우리는 마르다 마리아처럼 아무런 도움 받지 못했다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들은 유대인들처럼 의심하고 불평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 생명의 주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 이런 생각과 말을 합니다. 지금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들은 없습니다.
  미움, 원망, 불평 이런 것들의 뿌리는 부활의 주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님을 믿을 때 미움은 사라집니다. 원망과 불평도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과 영생은 평안과 여유와 행복과 감사와 자유를 줍니다.

2. 네가 믿으면(38-44)

  38,39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유대인들의 불신에 가득한 죄악된 말에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나약하고 죄악된 세상에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시신을 굴속에 두고 입구는 짐승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로 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죽음을 이기는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때에 마르다가 할 일이 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돌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금 죽은 자를 다시 살려 살아 있는 세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데, 가로막은 돌을 치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가로막은 돌을 마르다가 옮겨 놓을 것을 명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다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로써 끝나면 완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믿음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로막힌 돌, 장애물로 꿈쩍하지 않는 돌을 밀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무덤 앞으로 가서 무덤 돌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냄새가 났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시신이 부패하고 있는 냄새였습니다. 마르다의 후각에 시체 썩는 냄새가 확 풍겨오는 순간 마르다의 마음에 있는 믿음도 확 식어져 버렸습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람에게는 감각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감각을 시각이라 합니다. 귀로 듣는 감각을 청각이라 합니다. 냄새는 후각입니다. 여자들은 예민한 육감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런 감각들은 믿음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믿음을 약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감각들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각들에 의해서 제한받는 믿음은 큰 믿음도 아니며 좋은 믿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4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십니까?

  첫째, 고백한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라비가 죽어있는 무덤 앞에 오니 그만 믿음이 사그라들었습니다. 무덤에서 냄새까지 진동하자 믿음이 완전히 다운되려고 했습니다. 믿음은 일과성 이벤트가 아닙니다. 믿음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장소가 바뀌었다고 믿음이 변해선 안됩니다. 감각기관과 이성에 휘둘려 믿는 일을 그만 두어선 안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같아야 합니다. 처음 믿었으면 나중에도 믿어야 합니다. 1학년 때 믿었으면 2학년 때도 믿어야 합니다. 더 잘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가진 믿음을 실제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지속시켜야 합니다. 1:1할 때는 믿는데, 캠퍼스에 가서는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테이블 믿음이요 앉은뱅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며 믿음을 얻고, 얻은 믿음을 실생활과 삶에서 지속시키고 더 키워 나가야 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오라비는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고 무덤에서는 부패하는 냄새가 나는데, 그런데도 믿어야 합니까? 믿음을 가지라고 이처럼 처절한 곳으로 나를 오라고 하십니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러 그렇다 하더라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구만리장천에서 무전기로 통신하며 나를 방관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곁에! 예수님은 지금 내안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와 같이 이 무덤 앞에 함께 계십니다. 냄새나는 무덤 돌 앞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매우 절망스럽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는 대 역사의 전주곡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뿐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십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구원역사에 가장 중요한 역사입니다. 사망이 그동안 얼마나 인류를 비참하게 하였습니까? 사망이 얼마나 인생을 불쌍하게 하였습니까? 이제 부활의 예수님 앞에 사망은 없습니다. 사망은 끝났습니다. 사망을 이기시는 부활의 예수님 안에서 인류는 새 희망과 소망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역사 속에 담긴 깊은 영적 비밀과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누가 보는가? 믿는 자가 보게 됩니다. 믿는 자, 믿음을 가진 자, 믿음을 지속하는 자, 그 믿음이 변함없고 부활을 굳게 확신하는 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기회를 수없이 맞이합니다. 예수님을 믿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왕따가 됩니다. 예수님을 배우려고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가시와 같이 찔러대는 사람을 만납니다. 행복의 샘터가 되어야 할 가정에 환난이 닥칩니다. 가장 사랑했던 양이 혹은 존경했던 목자가 실족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눈앞의 형편과 상황에 상관없이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믿는 자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믿음으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양들을 위하여 하셨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가 드러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향해서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로 얼굴에는 수건에 쌓인 채로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5:25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주인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새로운 생명,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의 영광,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3.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45-57)

45,46절을 보십시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이 일을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이 틀림없다고 기뻐하였습니까? 47-49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공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역사는 메시야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놀라운 메시야의 역사를 보고도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이 가진 기득권만을 지키고 움켜쥐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로마에게 대항하는 민중지도자가 될 지 모를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말은 해괴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해괴한 논리를 펴는 그들의 말 중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이 있었습니다. 50-5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알지 못하고 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사역을 한마디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세상만민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납니다.

54-57절을 보십시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모든 백성들에게도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체포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주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 부활의 주 예수님, 생명의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계속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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