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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 1-19

작성자윤신숙|작성시간11.11.03|조회수11 목록 댓글 0

나귀타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12 : 1-19
요절 / 요한복음 12 :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예수님을 ‘왕중왕’이라 부릅니다. ‘King of King!’ 모든 만물들과 온 세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높으신 왕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인격은 한없이 겸손하십니다. 그 사역은 끝없이 낮아져 섬기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가?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스리시는 왕이신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의 위대하신 통치를 받는 평화의 백성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 향유 부은 마리아(1-8)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때는 유월절 6일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다가 탈출할 때 마지막 재앙이었던 장자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9가지 재앙을 겪고서도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했습니다. 재앙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준다고 하다가 재앙이 그치고 나면 말을 바꾸었습니다. 결국 장자재앙이 온 이집트를 덮어서 이집트의 모든 첫 태생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죽음의 사자에게 전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때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그 맏아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문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건너뛰었다’는 뜻으로 ‘유월했다’ 해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을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건너뛰고 그냥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십자가에 그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에 다다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킬로 정도 거리의 작은 마을이었고 이곳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께서 오시자 나사로 3남매와 온 동네가 잔치를 시작했습니다. 음식솜씨 좋고 일 잘하는 마르다는 잔치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12제자들과 여러 손님들과 같이 기쁨의 잔치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그 자리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생명의 주, 부활의 예수님 은혜를 누구보다 실감나게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런 잔칫날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가 아주 비싼 향유 한 근을 통째로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히말라야 산맥의 고원목지에서 자라는 나드에서 짜낸 것으로 아주 귀한 고가품이었습니다. 당시 처녀들은 결혼하면 사랑하는 남편에게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머리에 뿌려주기 위해서 결혼혼수품으로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마리아의 진심과 사랑과 꿈이 담긴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향유를 아낌없이 통째로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어째서 마리아는 이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단번에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까?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께 깊은 감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으로 마리아를 구원하여 주시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더러운 죄 속에서 고통받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죽어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했습니다. 인생이 저주요 영혼이 저주요, 그 마지막이 저주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름답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마리아의 내면을 물들였습니다. 세상풍조는 마리아의 인생을 비참하게 하였습니다. 아름답고 고상하고 사랑스럽게 살고자 하였지만 마리아의 내면에는 시기와 미움과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죄는 그를 삼켰고 마리아는 완전히 죄에 사로잡혀서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과 따뜻한 사랑과 섬김은 마리아를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 마음에 깊은 감사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곧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머지않아 인류의 죄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실 예수님께 서둘러 가장 귀한 향유를 부어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알았을 수 있습니다. 또 모르고 드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습니다. 모든 다른 일보다도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하였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과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은혜를 깊이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리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를 풀어 향유가 흘러내리는 예수님을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이것은 비싼 것을 드렸다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얕은 헌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신을 구원하신 메시야로 높여 드리는 진심을 담은 경배요 예배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 죽음까지도 물리치신 진정한 메시야, 자신의 구원자를 경배하고 예배하는 깊고 뜨거운 감격이 가득하였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마리아의 헌신과 경배가 있을 때 여기에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다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삼백 데나리온은 지금 돈으로 하면 2천만원에서 2천5백만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그런 값비싼 향유를 그냥 부었으니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였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의 마음 중심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대신 자기욕심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특히 자기를 위하여 돈을 사랑하는 욕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사랑도 돈으로 매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값비싼 향유를 어떻게 돈으로 계산하겠습니까? 거기에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고 계산해서는 안되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과 경배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유다는 무례하고 악하게도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3백 데나리온 돈으로 계산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소 사랑보다는 돈, 사람보다는 자기유익에 더 집착해 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십시오. 사도요한은 유다가 돈궤를 맡고는 그것을 훔쳐가는 ‘도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마리아를 변호해주십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미리 예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구속역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예비하였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한 방울도 허비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마태, 마가복음을 보면 복음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나 마리아의 헌신을 기념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진심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심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과 사람은 나의 진심을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무시하고 배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드리는 진심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2. 나귀타신 예수님(9-19)

  9절을 보십시오. 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까지 몰려 나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도 보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보고자 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의 인기를 가겨가는 원인이 되기만 하면 예수님도 죽이고자 하고 나사로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사람들의 인기와 사랑을 차지할 욕심이 너무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생명 역사의 열매까지 모두 죽이고자 하는 사단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만 높아지고 자기만 사랑받고자 하는 욕심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명역사에 거침돌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나보다는 예수님, 나를 내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앞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비우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약 270만 가량의 순례자들이 모여 든다고 합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어떤 병, 어떤 불구자도 다 낫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놀라운 능력자 예수님을 그들은 메시야가 아닌가? 메시야가 아닐까? 고대하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까지 다시 살리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는 틀림없는 메시야다!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성경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가 ‘메시야’를 전적으로 이스라엘만의 메시야로 단정 내렸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의 압제를 종식시키고 찬란한 다윗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주실 정치적 메시야, 민족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님께서 베다니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자 이들은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왕을 영접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왕으로 소리 높여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이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그릇된 기대로 열광하는 것을 아시지만 굳이 그들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야 이십니다. 그러나 1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니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 새끼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예수님 오시기 500년 전에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스가랴9:9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을 두고 백성들은 끝없는 기적을 이루는 능력의 예수님이 드디어 로마를 몰아내 주시러 오시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의 세력을 몰아내고 왕이 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왕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 생활에 한이 맺혔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에게는 더 한 맺힌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뼈에 사무친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죄와 사망으로 모든 세상을 압제하는 사단에게서 모든 영혼들을 벗어나게 하시려는 더 사무친 소원이 있습니다. 인류를 속박하는 죄와 모든 인생을 절망하게 하는 원수 사망의 세력을 파하시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셔서 인류의 원수 죄와 사망을 완전히 박살내십니다. 사단의 최후의 보루요, 마귀의 마지막 권세, 사망을 몰아내시고 만유의 왕, 하늘과 땅, 영계와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굴복시키는 ‘왕 중의 왕‘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왕이 되지 아니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는 진정한 왕의 길로 가심으로써 오늘날 나는 내 인생의 저주를 벗게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님 때문에 나는 승리자요 나는 영생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찬양하고 소리 높여 영광드릴 진정한 왕, 왕의 왕! The King of King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셔서 권위와 명령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그의 통치와 다스리심이 진리와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과 우리를 행한 절대적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진리와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 참 평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인생에 평화가 옵니다.

  셋째,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미국의 민주당의 심벌이 당나귀입니다. 미국 민주당이 심벌을 당나귀로 했다고 해서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였습니까? 90년대 초에 북한을 폭격하겠다고 나선 클린턴 행정부가 민주당 정권입니다.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것도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공화당이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평화를 표방하고 겸손히 백성을 섬기겠다고 공언하는 사람들과 단체는 많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백성들을 겸손과 평화로 섬겨주는 곳은 많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지내보면 진정으로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기보다 사업적이고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에 젖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게 눈에 띕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겸손하게 섬기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짐을 다 벗겨주십니다. 죄 많은 우리들의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약점을 참아주십니다.
  나귀타신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의 모임에 오시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다스려 주셔서 모든 학생들이 우리 모임에 오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신나게 마음껏 와서 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나귀타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땅에 발이 질질 끌리는 재미있는 모습의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입가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그 어느 누구도 친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랑과 겸손과 온유의 주 예수님을 오늘 만나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시려고 나귀타고 겸손하게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쉼과 평안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의미를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낙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열광하는 것을 보고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시기심 때문에 도무지 왕으로 오시는 겸손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메시야 예수님을 하염없이 미워하기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뜨거운 감격과 감사로 가득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 생활이 겸손과 평화로 가득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날 우리의 심령과 면에 가득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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