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말씀 / 요한복음 13 : 1-35
요절 / 요한복음 13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시기 몇 시간을 남겨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시고 재판받으신 후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남기신 특별한 오늘 말씀을 우리가 깊이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0)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죽음이 가까이 온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과 동족들로부터의 버림받음과 무지한 로마군들로부터의 구타와 고문들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우며 수치스러운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아시고 계시는 예수님께는 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행하신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룟유다의 배신을 감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실망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유다는 예수님의 신뢰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2제자그룹의 재정 관리자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세속적인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한편으로 돈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의 큰 권세를 얻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두 마음을 품었을 때 사단에게 그 마음이 팔리고 말았습니다. 딴 생각을 하며 분열되어 있는 그의 마음으로 사단이 파고들어 예수님을 팔 생각까지 집어넣었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들이 다 옳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내 안에서 느끼고 있으니 선하고 합리적일 것이라 여깁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사단이 집어 넣은 생각이 들어 있을 수 있고, 말씀을 듣고 생겨난 성령에 속한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성령에 속한 생각이 가득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들이 나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보아야 하고, 기도모임을 가져야 하며, 1:1 성경공부와 예배드리며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마음이 사단에게 팔려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는 중에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이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저녁 식사하는 이곳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드시는 마지막 저녁식사자리 곧 최후의 만찬장입니다. 그런데 이 만찬장에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발 냄새였습니다. 땀과 먼지에 절은 그 냄새는 인간적인 경쟁과 시기, 질투에 가득한 제자들의 내면에서 풍겨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내면성과 인격의 수준이었습니다. 유대풍속은 식사 전에 그 집 하인이 나와서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고 하인이 없으면 가장 젊은 사람이 발을 씻겨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연소자로 업신여김 받기 싫어했기에 그대로 냄새나는 발을 가지고 예수님과 만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인간적인 내면성을 아시고, 먼저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하인과 같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감당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예의와 의리를 앞세우며 발을 내놓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내가 이룬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시는 의미를 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씻어주시는 것을 거절하면 예수님의 구원과 상관없다고 하시자 이제는 다 씻겨달라고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수제자로 세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그를 특별히 사랑해주셨고 그를 구별된 12제자들 중에서도 더 세워주셨습니다. 그는 더! 더 많이 자기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발만 씻겨주시고 자기는 손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비교의식과 인간적인 경쟁심이 여전하였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온 몸이 깨끗한 사람이라 말씀해주십니다. 비록 경쟁심과 인간적인 면이 많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구별된 사람이라 하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다른 제자들도 모두 깨끗하게 된 사람이라 인정해주십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깨끗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유다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저희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은 12사람의 그 냄새나는 발들을 하나하나 다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인격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발 크기도 다르고 냄새의 정도도 달랐습니다. 예수님께 발을 내어 놓은 12사람의 발 중에는 장차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의 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발들을 다 씻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부활하셨다가 다시 승천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남겨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려가실 때까지 그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발을 씻어주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주님 오실 때까지 하도록 하십니다. 무엇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언과도 같습니다. 이 당부는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서 간절히 주시는 절대적인 방향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제자들이 절대적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그러면 발을 씻겨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저녁마다 물을 떠서 서로 발을 닦아주기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이 상호간의 인격적인 약점과,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고 감당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지방은 건조하였고, 당시에 사람들은 샌달을 신고 다녔습니다. 문을 열고 걸어 다니기만 해도 발에는 먼지가 부옇게 달라붙었습니다. 발에서 나는 땀과 엉겨서 사람들은 발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길에는 온갖 버려진 더러운 것들도 많아 발에 튀기도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인생은 태생적인 약점, 성장과정에서의 나쁜 영향, 죄악된 세속의 영향,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본받았기에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당사자에게도 큰 손해가 되지만, 곁에 있는 사람, 함께하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상처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상호간에 서로 짐이 되는 점 상처가 되는 점들을 용서하며 용납하고 서로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간절히 당부하고 가르치시는 방향입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제자들은 섬기게 되면 자기들이 무시당할까봐 섬기는 것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면서도 섬기셨습니다. 섬기셨지만 예수님께서 무시당하게 되었거나 천하게 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본을 보여주셨으므로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기꺼이 섬기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위대하게 되는 줄 깨닫고 서로 섬기는 일에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복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그 무한한 은혜의 세계에 나아가게 됩니다.
18-30절에는 끝내 배신하는 가룟 유다와 그런 유다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를 회개하도록 도우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은 배신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자기를 먹이고 돌봐준 주인을 뒷발로 차기 위해서 ‘뒷발을 들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식사를 하고 있는 12제자들 가운데에서 장차 예수님을 배신할 자가 나올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21절에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성경에 예언된 일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소화하도록 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오니이까(24,25) 예수님은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떡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이 들어갔어도 그를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유다의 이름을 꺼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떡을 찍어서 주시며 그의 죄를 매우 개인적으로 지적 하셨습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인격적으로 지적하신 것은 유다도 회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끝까지 그를 도우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유다는 생각이 사단에게 팔렸을 뿐 아니라 사단이 심은 생각이 그의 행동까지 지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습니다. 유다는 그 길로 나갔습니다. 성경은 밤이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어둠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둠을 향해 문을 열고 자기 발로 어둠의 권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기의 죽음을 돌보지 않으시고 자기 양들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2. 서로 사랑하라(31-35)
31-33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어둠을 향하여 걸어 나간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아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영광을 얻으십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인류의 죄문제를 해결하시는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이 실제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 승리의 영광을 주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그를 만유위에 높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더욱 부활과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스러운 승리를 확신하셨습니다.
이제 남는 것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으신 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덧입으실 것입니다. 이 길에 제자들은 함께 올 수 없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만이 가시는 길이고 예수님께만 주어진 길이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 계명들은 하나라도 어겨서는 않됩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하라고 하신 것을 반드시 해야 하며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않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새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서로 사랑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형편 따라 할 수 있고 못할 수도 있는 상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절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인해서는 안되듯이 사랑을 않해서도 안됩니다. 간음을 행한 자가 천국에 갈 수 없듯이 사랑을 행하지 못한 자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둘째,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방송과 영화, 비디오, 만화, 소설, 인터넷, 휴대폰등 현대사회는 눈부신 미디어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미디어들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상업주의에 편승한 인본주의 문화입니다. 사랑을 감정차원에서 해석하고 다루는 것입니다. 미디어가 전하는 사랑은 선정적이며 감정적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인격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의지로서 행하는 노력이어야 합니다.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조차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그럴만한 힘이 없으므로 우리는 사랑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배우고 연구하고 따라해야 합니다.
셋째, 사랑의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 그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만큼 사랑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유다까지도 끝까지 화내시거나 내쫓지 않고 도우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서로 경쟁하느라 발도 씻지 않고 밥을 먹는 제자들조차 이미 깨끗함을 받았다고 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아직 죄인된 자들을 위해서 내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여도 그만큼은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은 가장 간단한 것 같으나 실상은 가장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워나가면 능히 지킬 수 있습니다.
넷째, 사랑할 때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제 그를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라 하신 사랑은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기에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이며 서로 사랑함은 순종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열심히 사랑할 때 우리를 위하신 예수님이 증거 됩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의 사도로 인정받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가 된 한 형제 한 자매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에 두시고 유언적으로 주신 이 새로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심령에 예수님을 모셔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계명을 주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