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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56-14:14

작성자윤신숙|작성시간11.11.03|조회수27 목록 댓글 0

내가 그 길이요

말씀 / 요한복음 13:56-14:14
요절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 자체가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길 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3:56-14:4)

  13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전에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매우 비장한 각오로 말씀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제자로서의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도 지금까지 개인기도하시는 때를 빼고는 어디를 가시든지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가 듣기에 섭섭한 대답이었습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길입니다.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길은 지금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변화되어 모든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순교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12제자들은 90세가 넘도록 장수한 사도 요한과 배신자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각자의 선교지에서 순교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베드로가 강력하게 자기 뜻을 말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은 베드로의 진심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큰 부담이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는 베드로와 큰 연약함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견해가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첫째, 베드로는 영적인 일을 인간적으로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고난 받으시는 것은 인류구원역사를 이루도록 하신 하나님의 역사요 영적인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역사를 의리와 의무감, 자신의 성실과 의지로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총에 권총탄알을 장전하여 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 충분히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십자가의 잔을 마시고자 영적인 투쟁을 하셨습니다. 필사적으로 영적 싸움을 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옆에서 잤습니다. 부탁해도 잤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내뱉는 그의 말은 책임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공부한 것 없이 A학점 자신 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영적인 과제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해결해야 할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은 영적인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도 영적인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서 영적인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생들은 이성 친구를 가지는 것으로 해결을 시도합니다. 오히려 마음의 평안이 깨집니다. 게임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영혼의 만족이 옵니까? 영혼은 더 공허해 집니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시도와 영적인 도전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1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다고 하고,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 하실 뿐 아니라 수제자 베드로에게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자 제자들은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로하고 확신과 평안을 주시고자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들이 근심하는 원인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 예수님을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만유 구원역사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인간 예수님이 자기들만을 섬겨주며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땅위에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구원과 영광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고난 받으시게 되자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지만, 다시 부활하게 하십니다.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 위에 왕의 왕, 주의 주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큰 구원과 영광이 됩니다. 제자들도 진정한 구원과 영광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더 큰 유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사 하늘 보좌에 오르시면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본향 하나님 나라에 진정한 처소가 보장됩니다. 이 처소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모든 믿는 자들이 소망하고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처소”는 단순한 거주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 용어로 많은 거실을 가졌던 고대 근동지방의 광대한 궁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을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볼 때 “처소”는 큰 성입니다. 매우 화려하고 매우 풍요로운 천국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로마인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세워 땅위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100년을 누리겠습니까? 200년을 누리겠습니까? 그들의 남은 생애 고작 30-40년의 물질적 영화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을 떠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저 밝고 환한 천국, 영원하고 무궁하며 풍족하기가 끝이 없고 영화롭기가 한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약속입니까?  이 땅위에 진정한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께서 예비하시는 처소, 위대하고 큰 성,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오직 예수님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를 만족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오늘 내가 가지는 것만이 내 영혼이 잘되고 내가 범사에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난 그 길!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 길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 하나님께로 가는 길, 제자들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배우며 그 길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내가 곧 길이요(5-14)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지금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몰랐습니다. 왜 고난 받으시는지 몰랐으며 고난 후에 부활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는 것이 자기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말씀에서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나,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분이 아니고 길 자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진리 그 자체, 생명 자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은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서 그 종착지가 다릅니다. 비참한 종착지가 있는가 하면 슬픈 종착지가 있습니다. 고통의 종착점이 있는가 하면, 절망의 종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길’에 대해서 고민하고 투자하고 열정을 쏟아 부었는지 모릅니다. 진시황은 인생의 길 중에서 영생의 길, 불사의 길을 찾고자 온 천하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세상에 있는 진리의 길을 찾고자 자연 법칙과 원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공자는 깊은 소원과 탄식으로 말했습니다. 朝問道夕死可矣(조문도석사가의) ‘아침에 길을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도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어느 길을 선택하여 어떻게 살아야 가장 올바른 인생을 사는 것일까? 오늘도 이 세상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간절히 진정한 삶이 길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길은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은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가 가장 좋은 길, 최고, 최선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선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길이십니까?

  첫째, 생명의 길이십니다. 사람은 영원을 사모합니다. 누구도 자기가 죽음과 함께 무섭고 어두운 죽음 저편의 흑암 속으로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노처녀 시집가기 싫다는 말과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라는 말이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영원히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뇌입니다.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야 합니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싶지 않은데 한줌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살 수 있는 길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이 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그 사람도 다시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 부활의 길, 영생의 길이십니다.

  둘째, 진리의 길이십니다. 진리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 ‘날씨가 선선해지니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더라’ 그러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가장 옳은 것이어야 하며 진리는 절대로 변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는 가장 선한 것이어야 하며 진리는 언제나 타당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혼돈스럽고 당혹스러운 것은 이 시대의 많은 진리들이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 친구가 됩니다. 만물에는 절대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상대성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무엇이 진리인가? 우리 지성인들 우리 젊은이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진리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보편적인 태초의 진리이십니다. 그 말씀이 모두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알의 밀알의 진리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진리이십니다. 성경 말씀에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진리 뿐 아니라 온 우주와 세상에 대한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셋째, 사랑의 길이십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이며 하나님과 닮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사랑을 소유할 힘도 없고 사랑할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가장 위대하고 완전한 사랑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무시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먼저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6절을 보십시오. 성경말씀은 길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길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어떤 축복을 받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생명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싫어하고 심판을 자초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길이 되셔서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무궁하신 복의 근원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우리는 가장 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7-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정신적 영적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사상에 영향을 받은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이 과연 타락한 육체의 모습으로 내려오실 수 있겠느냐? 반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완전하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껏 예수님과 3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구별되시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십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른다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참고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다 지으시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과 악한 영들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물질세계 뿐 아니라 영계에서도 가장 높으신 주님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일들은 다 구약의 성경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을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능력과 은사를 받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론이나 마음에 평안을 누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하고도 놀라운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길입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이십니다. 길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생명의 사도, 진리의 제자, 사랑의 전도자가 되어 풍성한 은혜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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