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말씀 / 요한복음 19 : 1-42
요절 / 요한복음 19 :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다 받으시고 죽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허물과 죄로 가득한 우리인생의 구원을 모두 완성하신 Good News로 심령깊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리라(1-16)
1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질 당할 죄가 없습니다. 빌라도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채찍질로 피투성이를 만들어 놓으면 참혹한 모습을 보고 무리들이 좀 진정 될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의 채찍질이란 것은 한 번 때려 봄직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가혹했는지 로마시민들에게는 가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채찍질 당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죽 끝에 쇠조각과 짐승의 강한 뼈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120대나 맞으셨습니다. 죄없이 모진 채찍질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질병과 질병의 고통을 대신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2,3절을 보십시오. 채찍질을 당하여 온 몸의 살이 뜯겨지고 전신이 피로 물들어 고통하는 예수님께 군병들의 희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왕”이라는 사람이 어째서 무력한가? 왕이라면서 이런 약한 모습을 가지고 잡혀와 있는가? 예수님을 얕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푹 눌러 씌웠습니다. 왕이 입는 망토처럼 보이게 하려고 자색 옷을 가져다가 등에 걸쳤습니다. 놀림을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께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시는 것은 심판대 앞에 우리가 모든 죄들이 밝혀져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 당할 것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죄없는 예수님께 가혹한 고통을 가한 후 총독부 앞에 있는 유대인 무리에게로 나가서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보라 이 사람이로다” 예수님의 얼굴은 가시관의 가시가 찔러서 흐르는 피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등은 채찍질을 당하여 고통으로 구부려 졌습니다. 무리들 앞에 나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는데도 죄가 발견되지 못했다고 무리들에게 말했습니다. 무리들의 흥분은 충분히 가라앉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흥분과 적개심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이성의 한계입니다. 현실에 맞게 이성적으로 머리를 쓰고자 하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고 오도가도 못하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무리들은 소리 지르는 중에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그 명백히 하신 일을 보고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그 아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나오자 빌라도의 마음에 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빌라도는 아침에 출근할 때 이미 자기 아내로부터 어제 밤 꿈이 아주 불길하니 오늘 재판을 할 때에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차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대한 재판 때문에 혹시 자기에게 무슨 저주 같은 것이 임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웠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이었지만, 두려웠습니다. 빌라도는 재판하는 재판관이었지만, 죄인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일신의 안일과 안녕에만 집착하고 진리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손해볼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소심하고 이기적인 지성인의 표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께 “너는 어디로서냐” 질문했습니다. 이는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체포할 권세도 있고 놓아 줄 권세도 있으니 자기에게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10절)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아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해서 예수님을 판 자들과 예수님을 사형집행하는 자들이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예수님을 죽도록 판결하는 빌라도는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다 알면서도 예수님을 죽게 하는 유대인들과 그 종교지도자들의 죄는 매우 엄중합니다. 그들은 고의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거스리는 자들입니다.
12-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았으면 강력하게 자기 입장을 지켜나가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타협하고자 하고 사람을 만족시키고자 했습니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마귀에게 팔리고 맙니다. 인간의 이성은 마귀의 공격의 꼬투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합리적인 생각이 들고 이성적인 판단이 들 때 그것을 영적인 것보다 더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 무리들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빌라도의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결코 한 사람 유대청년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손해보는 일을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적인 이득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죄없는 예수님께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을 받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유대인들의 함정에 빠져서 소극적으로 사형언도를 내렸다고 알아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보다 자기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진리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적극적인 죄인입니다.
2. 다 이루었다(17-30)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다른 두 사람의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습니다. 19-22절을 보십시오. 십자가형을 당할 때 십자가 위쪽에는 그 죄인이 무슨 죄로 십자가 사형을 당하는지 죄패를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여졌습니다. ‘유대인의 왕’인 것이 죄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 죄패로 붙여진 것은 예수님이 진정한 왕 인류의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영적인 표시입니다. 빌라도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달았고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이 위대하고 장엄한 죽으심이 인류의 참 메시야의 죽음임을 알리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십자가 아래에는 한판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가지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속설을 믿고 죄수의 속옷을 가지려는 로마군병들이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현장에서 속옷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은 영혼의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의 삶에 끝이 있고 모든 사람이 맞이하는 죽음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 캠퍼스의 분위기도 이와 같습니다. 순간을 즐기며 열심히 놀며 모든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가 하면, 많은 학생들이 오직 자신의 이익과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자기유익에 혈안이 되기도 합니다. 시대의 영적인 무지, 영적인 무관심은 나날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며 그 아래에서 가슴 아파하는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의 복음역사를 동역하는 동역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친을 육신의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시고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믿고 맡길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십자가의 고통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자기가 보면서 고통받고 그러면서 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극심한 고통속에서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69:21절 말씀을 이루시고자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 신포도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간절한 소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3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이 지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형, 인류의 사형방법 중 가장 잔인한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죄없이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무엇을 다 이루신 것입니까?
첫째,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세상에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과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불순종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때부터 인류를 다시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시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약속은 믿음의 조상들과 선지자들과 왕들과 특별하게 택함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둘째,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죄문제 해결을 다 이루셨습니다. 인간은 영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합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영원하기를 원하지만 영원할 수 없고, 추해지고 싶지 않지만 추해지고,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여기에 인간 불행의 근본이 있습니다. 영원하고자 해도 영원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 거룩하고 깨끗하고자 해도 추하고 더럽혀지는 근본 원인이 바로 죄문제 입니다. 죄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죄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죄값을 치루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 죄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이 문제해결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역사를 믿으면 됩니다. 죄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수행정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죄값을 내가 치르겠다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셋째, 나를 향하신 사랑을 다 이루셨습니다. 요한1서 4:10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심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사랑할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희생해줄만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껴줄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주셨습니다.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다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 이루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다 이루신 우리 주님을 소리높여 찬양합니다.
3.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31-42)
31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시체를 밤새도록 나무에 달아 놓는 것은 그 땅을 더럽히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은 안식일이었을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 중에서도 마지막 7일째 되는 그야말로 ‘큰 날’이었기 때문에 시체를 얼른 치우기를 원했습니다. 32-34절을 보십시오. 빨리 시체를 치우기 위해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들을 마지막으로 확인 살해하는 것이 큰 망치로 다리를 부러뜨려 충격을 가하여 혹시 숨이 붙어 있는 죄수들을 마지막으로 사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는 다리를 쳤지만, 예수님은 이미 숨졌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물과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물이 흘러나온 것은 완전히 사망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은 것도 구약성경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도 구약성경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메시야 이십니다.
38-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었으나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큰 부자였고, 니고데모는 공회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들의 심령에 담대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의 묘실에다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니고데모는 백근이나 되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로써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리라”는 이사야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실들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사랑과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을 심령깊이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서 평안과 구원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