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2일 주일메시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 요한복음 1 : 1-18
요절 / 요한복음 1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세기 초대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고난과 시련이 컸습니다. 로마 황제가 교회를 없애려고 물리적 정치적 핍박을 가했습니다. 유대교는 A.D. 90년부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저주하고 회당 출입을 금하며 축출했습니다.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율법주의가 교회를 분열되게 하였습니다. 영지주의가 여러 모양으로 교회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으며, 영혼이 더러운 육체를 떠나 존귀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비밀한 영적인 능력을 별도로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시련과 도전을 물리쳐야 하는 배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복음은 기록되었습니다. 2015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한복음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외적으로 내적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서 안과 밖의 어려운 도전을 극복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5)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에서 나신 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섬기는 종 예수님을 중점적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도 하나님의 복음역사에 쓰임 받으시는 인간 예수님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므로 두 가지 주목할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서의 태초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때를 말합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 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들은 말씀이란 말을 자주 썼습니다. 그들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들의 ‘로고스’는 이성, 법칙, 생각을 의미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우주를 다스리는 신의 이성 혹은 만물의 이성적 원리를 의미했습니다. 여기 요한복음에서 기록된 “Logos”는 인격을 가지고 계시며, 영원 전부터 계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으로 계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는 말씀으로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약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신 분으로서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중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창세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장 17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고 로마서 9장 5절에서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도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9장 5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미가서5장 2절에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즉 영원부터)에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외쳐 증거할 때에도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요 1:15)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2절 말씀은 1절 말씀을 부연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격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하셨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하셔서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친히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으로써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높이고 경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치 나의 수호천사처럼 여긴다든지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분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온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해서 사랑하고 경배할 분이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이 주는 권세와 두려움에 매여 모든 행복을 잃고 말았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값진 것들과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4: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죽음의 어두운 그늘에 앉은 인간에게 빛이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연계에서 빛은 절대적입니다. 생물계, 생태계에서 빛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빛이 있어야 식물이 광합성 합니다. 식물이 있어야 동물이 살 수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있는 곳에서 사람도 살아갑니다. 빛이 없으면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유기물과 생물계 뿐 아닙니다. 빛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에너지원입니다. 태양이 발산하는 에너지의 1%를 우리 지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전하는 빛을 통하여 들어오는 에너지가 없다면 지구는 모든 에너지와 동력을 상실합니다. 이와 같이 빛은 생명이며 운동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빛과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며,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생명의 빛이 비취는데, 어둠에 속한 자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사모하다가도 막상 빛이 비취면 빛으로 나오기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어둠속에 자기를 숨기며 어둠에 묻혀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의 속성은 이와 같이 어둠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어둠에 적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생명 길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6-18)
6-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창조주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해주는 증거자가 있다면 이 사실은 더 확실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에 거하면서도 빛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빛에 대하여 증언해 줄 증거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거자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여 예수님 맞이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세례요한이 증언한 빛은 참 빛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면서 마치 모든 어두움을 몰아 낸 것처럼 행세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참 빛, 생명의 빛, 영원한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십니다. 죽음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셔서 우리에게 조금도 어두움이 없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써 어두운 세상을 비추십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써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비추어 주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 못한 세상,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 세상의 가장 그릇된 일 두 가지가 이 말씀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피조물로써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것과 구원을 갈망하면서 구원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 공경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이시지만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요구조건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구원,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전 인류에 대한 구원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구원, 자기들만의 구원을 원했습니다. 자기들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환영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세계의 로마인들은 왜 힘없는 식민지 청년으로 오셨는가? 업신여겼습니다. 헬라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럽고 추하고 악한 육체로 오실 리가 없다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각종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순수하게 믿음의 법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믿음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람들이 믿고 안믿고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가장 놀랍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최고의 은혜는 말씀으로 계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서서 말씀 드렸듯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로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러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와 함께 거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해주시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한 상처가 깊습니다. 영혼의 상처가 깊고 마음의 상처가 깊고 몸이 질병과 노화와 각종 핸디캡으로 상처도 많고 어려움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아낌없이 흘리시고 우리에게는 심판대신 구원을, 영벌 대신 영생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속성인 은혜와 진리가 가득하십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형편없는 죄인인 인간에게 심판을 면해주고 영생을 주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과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에는 반드시 죽음의 심판이 따른다는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진리가 분명하게 증거 되었습니다. 고난 후에는 영광이 오며,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는 진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절대 진리가 가득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이 14절 말씀을 기록한 것은 당시 초대교회를 크게 괴롭힌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유대인 크리스천들 일부가 주장하는 율법주의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이단이 생겨나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믿는 성도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가 커나가는 200~300년 동안 예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지금도 이단들의 교리 속에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교리적 요소가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헬라 철학과 동방의 여러 사상들을 복음진리에 혼합시켰습니다. 그들은 헬라철학 이론을 대폭 수용하였습니다. 영혼은 고귀하나 육체는 더럽고 추하다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 듯하지만, 여기서 심각한 주장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고귀한 영혼이 추악한 육체를 벗어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영적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자기들에게만 허락된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요즘 이단들과 비슷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영지주의자에서 나온 자들 중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추하고 더러운 인간의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부정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한 것이라고 하자, 그들은 사도들이 보고 체험한 것은 신적인 능력으로 보여 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일 뿐,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복음의 원수들의 주장이 헛된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깔보고 비웃는 로마의 힘의 철학과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는 당시 교회와 양들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며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가인이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허술한 제사를 드리고도 아벨을 향해서 씩씩거릴 때, 죄를 다스리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자기도 죽임을 당할까봐 두렵다고 하자,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이 반복해서 허물을 범할 때, 아브라함이 드러누워 있을 때, 아브라함이 13년이나 인간적인 잔재미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감당하신 사랑입니다. 연약한 이삭을 강하게 하셔서 부자가 되게 하시고, 욕심 많은 야곱을 참고 도우셔서 위대한 믿음의 조상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배웠지만,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전쟁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수없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해주시고 먹여주시고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기이하고 놀랍습니다. 끝없는 사랑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는 끝없이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이 진행해 왔습니다.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가 모두 모여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며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육신의 은혜가 이와 같이 크고 놀라운 은혜요 진리일진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영적 깨달음은 허무맹랑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님 가현설은 은혜도 진리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초대교회 시대에는 복음의 능력과 예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원수들을 물리치는 은혜와 진리였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면에서 은혜와 진리가 되는 것입니까?
오늘날은 냉담한 시대, 미워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술집약적 산업사회입니다. 제가 학생 때, 우리나라는 봉제인형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라디오, TV를 조립해서 다른 나라 제품 상표를 달아서 팔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77년 온 나라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고 난리였습니다.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돌파했던 것도 그해였습니다. 작년 수출액이 5700억 달러입니다. 경상수지 흑자가 900억 달러였습니다. 2014년 우리 국민들 GDP는 2만4천 달러입니다. 수출은 57배로 늘었고, GDP도 수십 배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풍요의 시대, 행복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대로 지금이 행복하다 평안하다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름도 없고 식량도 자급이 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은 기업들이지만, 한국 재계 서열 3위의 SK, 10위 한화, 14위 CJ 그룹 총수들 구속되어 감옥에 있습니다. 사면 없이 징역 만기를 채우고 있습니다. 17위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강력한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18위 동부그룹에 대한 해체 및 매각 절차를 진행하고 있고, 동양그룹은 청산했습니다. 동부 회장에게서 핵심계열사 경영권을 박탈했으며 동양회장은 부실경영과 불법이 드러나 1심에서 징역 12년 형의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검사는 징역 15년을 구형했었습니다. 2013년 서열13위 STX그룹도 사라졌습니다. 1998년 이후 우리나라 기업은 빽이나 줄이 통하지 않습니다. 경영실적, 수익창출이 중요합니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시대, 이런 기업 환경에서 기업의 결정은 매우 타이트합니다. 인사정책도 그러합니다. 특별한 능력이나 경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데려오는 법이 없어졌습니다. 일자리는 매우 혁신적이며 경쟁력 강한 인재들에게만 주어집니다. SKY 학벌, 간판도 소용없습니다. 기업들은 꼭 필요한 사람들만 뽑으려 합니다. 1997년 이전같이 일정 기준의 사람을 일단 뽑아서 자기들이 키워서 쓰는 방식은 취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직무능력을 원합니다. 기술 중심 산업사회에서 고도의 혁신역량을 확보했거나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소득이 주어집니다. 그들도 내부 경쟁이 치열하여 언제 도태될지 모릅니다.
이런 사회에서 두 부류의 무책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약자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연약하여 경쟁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비책도 없습니다. 경쟁에서 쳐진 사람들은 할 게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곳이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열심히 경쟁을 하든지 경쟁에서 뒤처지면 그대로 사라져야 합니다. 살벌하고 슬픈 일입니다. 둘째는, 약자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싶지만 기득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는 비주류들은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경쟁에 뛰어들 수 없는 약자들에게 분노하라. 분노하라 조장합니다. 이것이 잘못되었고 저것이 잘못되었고 요것도 잘못 조것도 잘못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자기희생이 없습니다. 이 시대는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희생하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내일을 이끌고 갈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기업들이 보지 않는다는데도 기업들이 그거 필요 없다는데도 끝까지 자격증 시험점수에만 매달립니다. 천안과 아산의 캠퍼스에는 이미 기회가 없어요! 절망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가득합니다. 이들에게 비전을 심고,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일은 자기를 주는 희생 없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 대충 지시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가르치는 것은 소용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우리 시대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며칠 전 학생 하나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찾아왔습니다. 그는 깊이 마음아파 제게 찾아와 줄줄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알콜중독 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의 손윗동서도 알콜 중독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그러고도 그대로 살다가 몇 년 전 사망했습니다. 이번 명절에 처제와 아랫동서가 설 쇠러 오지 않았는데, 그 집도 알콜 중독으로 인하여 위기에 처했습니다.
죄가 이렇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이 귀한 인생들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고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나를 섬기셨습니다. 나를 참아주셨습니다. 나를 기다려주셨고 나의 허물과 실수를 다 눈감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땅 끝까지 낮아져 나를 섬기셨건만, 정작 지금 우리는, 나는,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의 은혜를 받고도 내어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나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과 나의 인내와 나의 마음과 나의 물질과 나의 기다림과 나의 신뢰와 나의 기도를 나눠주어야 합니다.
은샘이는 자라면서 센터 나오는 대학생 언니들에게 자기 방을 내주었습니다. 다윗이는 대학생 형들은 52평 아파트에서 더운 물로 하루에 두 번씩 샤워하는 동안 추운 센터에서 살면서 찬물로 샤워하며 6년을 살았습니다. 과외도 학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좋은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경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천년 전,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물리치는 생명의 말씀은 오늘날 약자들을 방치하고 약자들을 이용하는 자들이 가득한 이 세상,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생명의 말씀이며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방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을 이용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겨야 할 연약한 이웃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며 나를 희생하며 섬겨야 합니다.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알려주고 인내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크고 위대한 분이시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가난한 모습,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 인격과 사역이 가장 위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세상 끝까지 낮아지셔서 말구유에 나시고 변방의 천한 동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위한 낮아지심에 예수님의 크고 위대함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까지 계신 분, 가장 먼저 계신 분으로써 땅끝 까지 낮아지신 분, 그 인격과 내면이 진정으로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은혜로서 은혜를 잇고 은혜로서 은혜를 대신하며 이어지는 은혜위에 은혜가 가득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십계명과 모든 율법을 그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깨닫게 할 뿐 그 백성들에게서 죄를 없애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진리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고 사망권세를 파하였습니다. 우리를 온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경륜, 놀라우신 은혜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류역사상 가장 놀라운 Good News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어두운 이 시대에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깊이 영접하고 절망하는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