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5일 주일메시지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말씀 / 요한복음 3 : 1-21
요절 / 요한복음 3 : 3
우리는 요한복음 1장과 2장에서 예수님은 누구신지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시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오셨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이러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왜 독생자를 보내야만 하였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1. 거듭나지 아니하면(3:1-3)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그를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은둔하고 금욕하는 에세네파, 부자이며 현실 참여적 기득권파인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매우 율법적인 생활을 했고, 사두개파와 함께 유대 종교지도자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바리새파의 시작은 바벨론 포로시절로 올라갑니다. 이들은 성경 전체를 암기하고 매일 3번씩 기도하며 금식과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을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1인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곳은 국가 원로들이 모여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고 재판까지 하는 곳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대법원 판사와 국회의원을 겸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 중에 승리함’ 이란 뜻입니다. 그는 학문의 승리자요, 명예의 승리자요, 율법의 승리자요, 인생의 승리자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 왔습니다.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큰 능력으로 그 시대와 자신의 생활에 뭔가 획기적인 변화를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를 어떻게 맞이하여 주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 니고데모와 우리들에게 주는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사회가 변화되기에 앞서서 본인 자신이 거듭 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거듭 난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령하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답답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자연인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존재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며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와 성공을 얻고자 합니다.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개인적인 목표에서 벗어나 사회가 정의로워지고 속한 집단이 공평하고 평등해지는 세상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런 사회 그런 집단이 각 사람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은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다 성취하였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입니다. 백성들을 착취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에게서 세금을 뺏어가고 횡포를 부리는 로마를 타도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의 삶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 하시는 말씀은 그에게 이스라엘의 독립이 최우선 숙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는 가장 절실한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정치적인 평화, 경제적인 번영이 최우선과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불행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하다가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고 영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십니다. 강조하고 거듭 강조하며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처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4-15)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생물학적 탄생을 다시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는 영적인 교훈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많은 학식이 오히려 그를 영적으로 미련하게 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거듭 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 죄를 따라 살았던 과거를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여 깨끗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으로 자기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를 고백하는 것이며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시는 것은 성령입니다. 거듭나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서 영적인 존재로의 탄생, 세상에서 속한 데서 벗어나 하나님에 속한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물질적 가치관에 지배받는 인생은 육체일 뿐입니다. 육체는 아무리 치장을 한다고 해도 육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변화된 존재여야 영적인 존재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러한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사실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하기 좋아하는 니고데모에게 실제적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재합니다. 성령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뚜렷합니다. 젖은 땀을 말리기도 하고 먼지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무를 뽑아 버리기도 하고 더 센 바람은 집을 부수고 큰 가축들도 날려 버립니다. 성령도 그 결과가 뚜렷합니다. 소심한 사람이 성령에 의해 거듭나면 담대해집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변화되면 헌신적이 됩니다. 성령은 질병을 고치기도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바람과 성령은 모두 뚜렷한 결과를 나타냅니다. 또한 바람은 동에서 불다가도 방향이 바뀌어 반대로 불기도 합니다. 일방적으로 부는 바람도 있지만, 휘감아 돌며 올라가는 돌개바람, 거대한 토네이도도 있습니다. 임의로 바뀝니다. 성령의 역사하는 방향도 어떤 사람에게는 세미하게 나타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을 낫게 하여 영광을 드러내지만 어떤 사람은 아픔을 남겨두어 영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성령의 방향은 성령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설명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의 문제는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본 것을 증거하십니다. 그는 땅위에서 사람들이 구원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역사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늘의 일, 영생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전혀 소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신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적인 말씀들은 모두 사실이며 이루어 진 일이고 또 이루어질 일입니다. 한심한 니고데모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행복을 주시겠다고 하면 반발합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안그래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비천하면서도 오만합니다. 우리는 비참하면서도 고집스럽습니다. 우리는 괴로우면서도 예수님의 도우심은 전혀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의 모습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증거를 받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 모든 말씀을 알아듣고도 마음에 영접해 들이지 않는 니고데모와 같은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대신 저주와 심판을 받으시는 일입니다. 비참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니고데모와 같이 고집 세고 우둔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싫어하는 아직 죄인된 니고데모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놋뱀처럼 완전히 십자가에서 녹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시편22: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녹아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 죄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봄으로써 살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다같이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이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인간에게 영생할 수 있도록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사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멸망에서 벗어나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심으로 죽기를 두려워하며 사망에 매인 자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이 니고데모와 같은 유대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자신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의 신앙을 전수받은 믿음의 사람들이요 구원이 확정된 사람들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율법을 지키며 착하고 깨끗하게 양심적으로 살고자 애써왔기에 구원받을 만하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영생은 땅위에서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노력으로 영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나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가 심각한 죄를 범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직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심각한 죄를 끊임없이 범하고 있던 우리를 위해서 귀하신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의 잔,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드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맛보고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 값도 그렇게 치루어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생각지 않으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멸망을 제하여 주시고 영생을 마음껏 주시게 되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크신 공로를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살리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 모두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이제 심판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구원과 영생이 우리의 앞에 놓였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요 영생의 선물입니다. 영생과 심판 사이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길이 아니면 그외에는 멸망입니다. 심판이 반드시 미래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심판은 현재적으로도 확대되어야 합니다. 영생의 선물을 받지 않을 때 심판은 지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으면 벌써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예수님을 희망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사모하면서도 옛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19-21절을 보십시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생명의 길이 주어지고 영생의 길이 놓였는데도 그 길을 알아보지 못하고 맹렬히 죽음의 길로 내려가는 것은 악한 자들이 어두움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 놀랍고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듣고 알았음에도 그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죄를 범한 인간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둠에 그냥 거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나의 영혼은 그렇게도 살리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피로 산 것입니다. 내가 어둠에 묻혀서 정죄 당하고 심판아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거절하고 그의 보배로운 피를 거절하는 자에게 남은 것은 심판과 정죄뿐입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결론적으로 어둠에 거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야 하셨습니다. 멸망하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