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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_요한복음 05강

작성자서 아브라함|작성시간15.03.22|조회수65 목록 댓글 0

2015년 3월 22일 주일메시지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 / 요한복음 4:1-30

요절 / 요한복음 4: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예레미야2:13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남편을 행복의 우물이라 여긴 여자에게 참된 예배와 생수를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줄 알고 참된 생수를 마시는 큰 은혜를 입으시기를 기도합니다. 


1.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15)


  1-4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을 시기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님을 향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죽으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는 경로를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로 잡으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우회하여 갈릴리로 오갔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에는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깊은 골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야곱의 우물이 있는 동네입니다. 시간은 정오쯤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날씨는 뜨겁고 긴 시간 도보이동으로 인하여 지치고 배고프고 목마른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갔고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혼자 그대로 앉아 계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홀로 물을 길러 오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중동의 낮 시간은 조용한 시간입니다. 길은 한산하며 사람들은 외출을 삼가며 쉬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에 괴로이 물동이를 이고 뜨거운 정오의 햇살을 아래 우물가로 오다니 여인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연 있는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여인을 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과 대화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대해서 여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사마리아 여자의 입장에서는 유대남자가 어째서 사마리아 여자한테 아쉬운 소리는 하는가? 한마디 쏘아붙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히 대화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여자 아래로 더 낮아져서 이 여인과 대화를 이어가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소개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오신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심사인 생수문제를 영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와 계신데도 쏘아붙이고 공격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 말씀을 조롱하고자 시도합니다. 야곱과 비교하며 예수님을 깎아 내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음성으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신중하고도 진실하게 우리 인생의 목마름과 그 목마름을 해결하러 오신 분이심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은 목마른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은 목마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든 에너지와 인생의 모든 자산들을 소모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첫째,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밖에서 계속 리필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리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Living water는 내 속에서 계속 솟아나는 최고의 생수입니다. 

  둘째,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합니다. 갈증을 영원히 해소시켜주는 것! 이것은 우리 인생과 이 여인이 간절히 희망하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갈증해소를 이루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줍니다. 

  셋째, 예수님의 주시는 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색다른 종류의 물이 아닙니다. 이 물은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가진 땅위의 물이 아닙니다. 이 물은 신령한 물입니다. 영혼을 만족시키는 물로써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은 자에게 임하셔서 그와 영원히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잃었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행복과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여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목마른 인생이었음을 드디어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이 괴로이 물 길러 다니는 인생이었음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대화와 겸손한 사랑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대화하게 되면 이렇게 자신의 삶의 모습을 제대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인이 이제 영적인 비밀을 깨닫기 시작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고 그 마음을 열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대화하는 마음을 열자마자 남편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리가 우리의 생수통에 가장 값진 생수를 부어 넣고자 하는데 생수통 속에 더럽고 오래된 구정물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새로 붓는 생수가 못 마실 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수를 받기에 앞서서 우리는 내 인생의 구정물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하여야 합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편문제인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고 물어보셨는데 여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여자는 자신의 남편문제를 솔직히 고백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잡아떼는 말도 받아 주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그 목마름을 해결함 받기 위해서 얼마나 괴로이 사람을 붙들고 자신을 괴롭게 했는지 아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인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놀라웠습니다. 여자는 갑자기 예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여인이 인생의 많은 험한 일을 겪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 여인도 예배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죄하는 이 여인도 사실은 예배를 사모하고 신령한 것을 기대하는 영적인 모습을 가득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은 진정한 예배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인생은 모르는 것을 예배하고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하여 방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 장소를 가지고 유대인들과 시비가 많았습니다.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심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는 전설이 있었고 제사장 아비멜렉을 만난 곳이라는 전설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그릇된 이론에 속아 그리심산을 예배장소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론이 비성경적이며 복음적이지 않음을 지적하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을 적대시하였습니다. BC128년에는 직접 쳐들어가서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분쟁에는 예배장소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목마른 한 영혼이 예배를 드리고자 하여도 어디서 드려야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진정한 예배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21-2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관건은,

 첫째, 예배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장소가 진정한 예배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대상을 올바로 해야 합니다. 사람이 내세우는 이론과 교리를 향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 진정과 신령으로 드려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을 말하며 형식과 모양이 아닌 영적인 예배여야 함을 말합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것을 사람들 보러 오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않됩니다. 일하러 오는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진심과 나의 인생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하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사마리아 여자의 내면에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피어났습니다. 이 여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은 메시야 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바로 여인이 소망하던 그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위해서 이땅에 오신 메시야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사마리아, 비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메시야가 되어 주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메시야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27-30절을 보십시오. 메시야를 만난 여인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을 피하던 여인이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자신을 숨기던 여인이 자신을 오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인의 내면에는 메시야를 만난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에게서 흘러나는 생수가 사마리아 온 동네로 흘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떠났고 여인이 버려둔 물동이는 우물가에 남았습니다. 물동이는 물 긷느라 고단하였던 여인의 삶입니다. 여인은 물을 마셔서 목마름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무거운 물동이 고달프게 하던 물 긷던 인생은 물동이와 함께 던져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은혜롭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여인의 그리스도가 되어주셨습니다.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여인의 참 남편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인의 내면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성령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여인의 죄, 우리의 죄를 다 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시고 하늘나라의 기쁨을 주십니다. 영혼이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기쁨,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우리를 가득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우리 인생, 나의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려고 오신 메시야 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에게 위로와 인정을 구걸하며 다니지 않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는 일은 비참하고 고단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내안에 계실 때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요구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아픔 겪는 일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장벽을 허물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 대 사마리아인이라는 대립과 반목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여인도 예수님을 대할 때, 유대인 VS 사마리아인 반목 구도를 앞세웠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보수냐 진보냐, 새누리냐 새민련이냐? 일베냐? 오유냐? 네이버냐? 다음이냐? 전라도냐? 경상도냐? 평준화냐? 비평준화냐? 천안이냐? 아산이냐? 사람들은 지금도 극한 대립에 몰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대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반목과 대립의 틀을 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사마리아인 문제를 넘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관심을 하나님의 선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두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편 가르기에 가담하여 증오와 반목 쌓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나는 부패한 기득권, 탐욕적 보수꼴통이 싫다. 나는 거짓말만하는 좌빨이 싫다. 나는 이 나라를 부정하는 종북이 싫다 이런 대립 프레임에 가담기보다 하나님의 선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에 열정을 투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성령에 진심을 드려야 합니다. 성령께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만날 때 누구든지 변화되고 구원받습니다. 사도 요한이 오늘 말씀을 기록한 것을 보면, 초대교회를 괴롭힌 영지주의 이단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헬라철학의 여러 복잡한 논리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간 육체를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영과 정신은 선하지만,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을 펼쳤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의 교리는 악한 육체를 제어해야 하기 위한 과도한 금욕주의로 나타났고, 구원을 위하여 비밀스러운 영적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며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혼혈족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육체의 소원대로 살아온 사마리아 여자, 남편을 다섯 바꾸고 현재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이 여자는 가망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비천한 사마리아 사람, 비천한 사마리아 여자가 예배에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말씀은 육체의 소원을 따라 살던 여인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메시야를 만나 그를 증언하는 극적 변화를 세밀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금욕생활이 아니며 비밀스러운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날 때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날 때 인간은 구원에 이르며 변화된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조차 육체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다고 주장 했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긴 행로에 곤하여 그대로 우물가에 앉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믿을 때 비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성령이 임하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이 예수님과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더 많은 이웃들이 대화하고 배울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선하고 거룩하고 존귀한 니고데모 뿐 아니라 비천하고 추하고 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나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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