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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 16 강 메시지_아산UBF

작성자서 아브라함|작성시간26.06.09|조회수43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제16강 메시지_아산UBF

열둘을 내보내시는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10:1-42

요절 |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장은 파송과 사명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산상수훈(5-7장)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를 가르쳤다면, 10장은 그 나라를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강화로써 사명과 파송에 관한 말씀입니다.

9장 끝에서 예수님은 모든 성과 마을을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한다고 보셨습니다(9:3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9:37-38). 10장은 그 기도의 응답입니다.

오늘 말씀은 첫째, 부르시고 권능을 주어 보내시는 주님(1-15절). 둘째, 박해 중에도 두려워하지 말라(16-31절). 셋째,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와 그 상급(32-42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I. 부르시고 권능을 주어 보내시는 주님 (10:1-15)

1절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권능은 어떤 일을 행할 능력과 권한입니다. 제자들이 행할 능력이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에 기반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부르사’, 그에 합당한 권능을 ‘주셨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올바를 때 부르심이 분명하고 부르심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권능이 따릅니다.

2절부터 4절까지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제자에서 사도로 호칭이 바뀌는데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보내는 분을 대신하는 전권대사입니다. 사도의 권위는 그들을 보내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열두 사람의 면면에는 부르심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마태는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던 친로마 부역자였고, 셀롯이라 하는 시몬은 로마에 무력 저항하던 열심당파였습니다. 세리와 열심당파는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 안에서 제자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삼 년을 주님과 함께 다니며 같은 권능을 위임받았고 같은 복음을 전했으나,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스승을 팔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실과 끝까지 신실한 것은 별개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심으로써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평범하거나 연약하거나 서로 다른 출신배경을 가졌지만,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말씀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구체적으로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지 세밀하게 알려주십니다. 먼저 보냄 받은 자는 예수님의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5-6절). 복음은 먼저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어져야 했습니다. 복음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의 순서를 따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같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마 28:19). 복음전파 방향은 유대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을 향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을 전파할지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절). 세례 요한이 외쳤고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메시지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것은 왕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천국이 이미 현재 속으로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전도자의 사명은 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8절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복음 전파를 수반하는 실제적인 치유섬김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이 네 가지 예수님의 권세로 행하는 능력의 섬김은 천국이 임했음을 보여 주는 표적들입니다. 질병과 죽음과 부정함과 귀신의 권세는 죄로 인한 세상의 비참한 상황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이를 회복하심으로 예수님을 통한 천국이 임함을 실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복음은 각 인생의 무너진 삶을 실제로 회복시킵니다.

8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거저’라는 말은 값없이, 선물로, 대가 없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가진 모든 것, 죄 사함과 생명과 권능과 복음은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니 받은 그대로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은 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며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 먹으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서도 목마른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초청합니다. ‘삯’은 일한 대가이지만 ‘은사’는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줍니다. 복음은 언제나 받은 자의 손을 거쳐 다음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초청했고, 누군가 우리를 섬겼고, 누군가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 받은 은혜를 안다면 역시 거저 주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으면 썩는 일이 일어납니다. 한 영혼을 섬기는 일은 내가 거저 받은 은혜에 대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9절부터 10절은 활동에 따르는 비용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해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일꾼을 돌보시는 분은 보내신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며 하루치 양식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쌓아 둔 만나는 썩었으나 날마다 의지하는 자에게는 날마다 양식이 채워졌습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직접 준비하고 계획하기보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11절부터 14절에서 예수님은 어느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 합당한 자를 찾아 그 집에 머물며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평안’은 히브리어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전인적 평화를 뜻합니다. 그 집이 평안의 인사를 받아들이면 평안이 거기 임하고, 거절하면 그 평안이 전한 자에게 되돌아옵니다. 전한 복음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받아들여지면 그 집에 복이 되고, 거절되어도 전한 자에게 돌아와 그의 상급이 됩니다.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나라고 하십니다(14절). 복음을 전하여도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거절에 대하여 복음 거절의 책임이 거절한 자에게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전하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듣는 자의 책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5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며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린 것이 이 말씀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심판 날에 그 동네보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견디기 쉬우리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듣고 거절한 자의 책임은 더 무겁습니다. 빛을 더 많이 받은 자에게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 앞에 세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과 같이 보냄 받은 사람의 기본도 영혼을 향한 긍휼입니다.

열두 제자를 사도라 칭하시고 전도여행을 보내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과 함께 이 땅에 남기신 중대한 방향이며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신 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 만민을 하나님께로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기 민족만의 구원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민족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 여기고, 그들 내부에서도 율법을 기준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판단하며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만민을 향한 사명을 잊었던 것처럼, 우리도 나와 우리만 생각하는 신앙으로 좁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만의 구원, 우리만의 안전에 머물 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품으셨던 만민을 향한 마음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죄를 대신 대속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 이 땅에서 주님 오실 날까지 원래의 하나님의 뜻, 곧 만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할 새로운 제사장 나라, 새로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세우시는 것이 오늘 말씀의 열두 제자의 전도여행 파송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에서나 마태복음에서나 동일합니다. 세상 만민이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피흘리셨습니다. 세상 만민이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가지고 새로운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 열두 사도들인 것입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어리지만 장차 이들은 온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나라 수많은 백성들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생명역사의 시작과 확장에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만민이 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고 내 문제와 행복과 명예와 안전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더 크고 아름다운 목적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만민이 주 하나님께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와 운명과 저주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고 회복하시려 예수님은 열둘을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II. 두려워하지 말라 (10:16-31)

16절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가서 감당할 현실을 알려 주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양은 자기방어 수단이 없는 가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장시켜 내보내지 않으십니다. 다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십니다. 뱀의 ‘지혜’는 타이밍에 대한 분별이고, 비둘기의 순결은 섞임 없는 순전함입니다. 일꾼은 지혜로우면서도 그 지혜가 교활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17절부터 22절에서 예수님은 박해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공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총독과 임금 앞에 끌려갈 것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증언의 기회가 됩니다(18절).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할 것을 때마다 주실 것이며, 말하는 이는 제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기 때문입니다(19-20절). 박해는 복음이 더 강력하게 전파되는 기회가 됩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박해가 외부에서도 오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 내주며,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합니다(21절). 외부의 박해는 압박과 두려움을 주는 반면, 관계 안에서의 박해는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습니다(22절).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견딤(휘포메노)은 무게를 견디며 끝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한 동네에서 박해를 받으면 다른 동네로 피하라고도 하십니다. 견딤에는 사명을 위해 지혜롭게 자기를 유지시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무모하게 자기를 계속 노출시키는 것을 중단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24절부터 25절에서 예수님은 박해의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불렀다면 그 집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제자가 받는 고난은 스승이 받으신 고난을 닮습니다. 제자가 세상에서 미움받는 것은 스승을 닮아 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박해는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의 박해는 공회나 채찍이나 총독의 모습으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박해는 조용하거나 일상적입니다. 직장에서 신앙을 드러내기가 부담스러워 숨기고 싶어지는 일, 가족이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오늘의 박해입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일하려다 불이익을 받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세상과 다른 길을 걷기에 마찰과 갈등을 겪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표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박해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세 번 나옵니다(26, 28, 31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진리가 반드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26-27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잠시 오해받고 정죄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리는 끝내 밝히 드러납니다.
둘째,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28절).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종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사람의 위협 앞에서 우리를 세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사람 앞에서 가장 담대합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돌보심이 있습니다(29-31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 곧 아주 적은 값에 팔리지만 그중 하나라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1절). 박해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아버지의 손 밖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일꾼의 안전은 세밀히 돌보시는 아버지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아버지의 허락과 주관 안에서 일어납니다.

III.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와 그 상급 (10:32-42)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시인하다’는 공개적으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땅에서 사람 앞에 주님을 고백하면, 주님이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 나를 고백해 주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복음은 본질적으로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 결단은 가까운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35절에서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불화하게 되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이 한 사람의 삶에 들어오면 가족 중심의 가치관이나 세상 보편추세가 최종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충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실 때 기존 관계들은 새로 세워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분께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그분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모든 사랑 위에 있어야 한다는 우선순위입니다. 부모를 향한 효도, 자녀를 향한 헌신, 동역자를 향한 우정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안에 있을 때 더 깊고 더 진실해집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계실 때 다른 모든 관계가 비로소 바른 자리를 찾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에서 십자가(스타우로스)라는 단어가 처음 나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에 대해 죽는 길을 걷는 일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기를 붙들어 지키려는 자는 참생명을 잃고, 주님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자는 참생명을 얻습니다. 움켜쥐면 잃고, 드리면 얻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요 12:24).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붙잡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제자가 걷는 자기 부인의 길은 스승이 먼저 걸으신 길이며, 그 끝에는 스승이 받으신 영광이 기다립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이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냄받은 제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우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때, 그는 우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의인을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그 사명 때문에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일꾼이 받을 상에 함께 참여합니다.

42절은 본문 전체를 마무리하는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냉수 한 그릇은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섬김입니다. ‘작은 자’는 연약한 제자를 가리킵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준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를 섬긴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에게 베푸는 가장 작은 친절도 사실은 그리스도께 직접 드리는 섬김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빠르게 변합니다. AI와 반도체가 세상을 흔들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주식과 정치를 이야기하며, 지역과 세대에 따라 얼굴을 붉혀 가며 대립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 갈래입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이대로!’를 외쳤고, 바리새인들은 ‘지키라!’만 강조하며 사람들을 판단하였으며, 셀롯당의 청년들은 ‘뒤집어야 할 세상’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대속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시며, 이 세상을 위한 열두 제자를 준비하시고 보내셨습니다.

오늘날 각 교회 안에도 여러 이슈가 있습니다. 지도자 문제, 장로 문제, 건물 문제, 시스템 문제로 일하는 사람의 힘이 빠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회가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전도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전도하여야 하고, 믿음과 영성과 내면과 인격 모든 면에서 전도에 합당한 사람들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까닭은 우리도 한때 목자 없는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무감만으로는 전도를 오래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찾아왔고, 누군가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고, 누군가 우리를 기다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거저 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캠퍼스와 세상에는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9:36).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 사명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 하나에게 건네는 냉수 한 그릇에서 시작합니다(10:42). 우리가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흘려보낼 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만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하여 우리를 써 주시고, 또한 우리가 다음 세대를 계속하여 전도할 제자로 세워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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