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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특강 제 2 강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대화하신 하나님)_아산UBF메시지

작성자서 아브라함|작성시간26.02.08|조회수78 목록 댓글 0

2026년 2월 8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말씀 / 출애굽기 3:1-4:17

요절 / 출애굽기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네가 할 말을 가르치리라" 

 

 정보통신혁명이 일어났고 생성형AI가 혁명적 변화를 진행하는 시대에 아직 많은 대화가 일방적 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을 품은 영혼과의 진정한 대화가 여전히 70년대 스타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말씀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80세의 도망자 모세와 대화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대화는 명령의 하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열어가시며, 그의 두려움과 의심을 하나씩 해결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대화 방식'을 배우고자 합니다.

 

1. 존재론적 공감(관찰-청취-동참) (3:1-10)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애굽 의 왕자였던 그가 장인의 양떼 돌보는 목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동족을 구원하려는 큰 결단을 하였지만, 그 일로 살인자가 되어 도망쳐야 했던 실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타지 않는 떨기나무는 불이 붙어 있지만 소멸되지 않습니다. 불타지만 소멸되지 않는 떨기나무는 고난받는 백성이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큰 나무가 아니지만 불을 품은 나무는 지금 초라한 나무같은 모세이지만 꺼지지 않는 불 같으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메시지 있는 상징으로도 볼 수도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며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잊고 있던 언약의 역사를 상기시키십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곧바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 세 개의 동사를 말씀하십니다. 보고(seeing), 듣고(hearing), 알고(knowing)입니다.  "분명히 보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보고 또 보았다'는 강조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훑어보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목하고 관찰하셨습니다. "부르짖음을 듣고"는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 부르짖음의 의미와 절박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근심을 알고"는 정보 인식 뿐 아니라, 경험적이고 관계적인 깊은 동참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내가 내려가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고통의 현장에 직접 임재하시겠다는 동참 선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계시며 명령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가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표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로 실현되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이제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네가 왕자직을 버리며 인생을 걸었었던 그 현장에 내가 이미 있었다"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을 존재론적 공감이라 합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자기들이 만든 관념적 구호를 먼저 던지며 대화를 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아시는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공감적 경청(empathic listening)'을 최고 모델로 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단순히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진정한 연대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전 동족을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에게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 시도는 정말 헛된 것이었는가?" “내가 왕자자리를 의미없이 버렸나?”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는 네 백성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모세의 과거 결단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그의 마음속 열망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모세의 그 결단 - 동족 구원을 위하여 애굽왕자 자리까지 버렸던 그 열정의 대상 - 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깊은 관심으로 살펴 보셨다고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화는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제자를 양육하거나, 동역자와 함께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고통과 상황을 먼저 보고, 먼저 듣고,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정체성 재정의 (3:11-12)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모세의 낮은 자존감과 깊은 열등감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모세는 인생을 세 개의 40년으로 살았습니다. 첫 40년은 왕궁에서 자라며 "나는 할 수 있다" 생각한 시기입니다. 사도행전 7:22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학술을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에 능하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둘째 40년은 광야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배운 시기였습니다. 셋째 40년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를 경험한 시기였습니다. 지금 모세는 두 번째 40년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그의 자아는 무너져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너는 왕궁에서 배운 지식이 있다", "너는 광야에서 단련되었다", "너는 이런 능력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대답하십니다. 모세의 정체성을 근본 재정의하는 답변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정체성 발달 이론에서 '정체성 혼란(identity confusion)'을 말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애굽 왕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히브리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디안의 목자로 40년째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정체성을 그의 능력(Who you are)에서 찾지 않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With whom)에서 찾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정체성을 학벌, 경력, 재능, 성취로 정의합니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무너지면 정체성도 함께 무너집니다. 현대 심리학은 이를 '조건부 자존감(contingent self-esteem)'이라고 부릅니다.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만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네가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 너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보증입니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네 존재가 의미를 갖는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증거까지 주십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예배가 지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보통 증거는 과거나 현재의 사실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나는 전도할 만큼 신앙이 좋지 않습니다", "나는 리더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 사역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여전히 능력 중심의 정체성에 갇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열등감을 신앙적 확신으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대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아상을 변화시키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진정한 변화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3. 계시 개방 (3:13-22)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의 두 번째 질문은 더 구체적입니다. 질문에서 호칭을 거론하고 묻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특별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문화에서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단순한 식별자 뿐 아니라 이름은 권능(power)과 본질(essence)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여신 이시스(Isis)는 태양신 라(Ra)의 비밀스러운 이름을 알아냄으로써 그를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주술사들은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을 소환하거나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질문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권능은 어디서 나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에 기꺼이 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본질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 - "I AM WHO I AM"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뜻은 첫째, 자존성(self-existence)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둘째, 영원성(eternality)입니다. "나는 있다(I AM)"는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한 영원한 현재를 의미합니다. 셋째, 불변성(immutability)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넷째, 신실성(faithfulness)입니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공개는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집트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진짜 이름은 비밀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마르둑(Marduk) 신은 50개의 이름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의 본질적 이름은 소수의 제사장만 알았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이름을 숨김으로써 인간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이름을 모세에게 공개하셨습니다. 이것은 극도의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구나 종으로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스스로 모세에게 해소하여 주신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이름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였는지도 알려주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함께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분이면서도 동시에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17-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세히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고(18절), 바로는 처음에 거부할 것이며(19절), 하나님이 여러 이적으로 애굽을 치실 것이고(20절), 백성이 빈손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21-22절) 전체 시나리오를 공개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리더는 정보를 독점합니다. "네가 알 필요 없는 것은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는 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계시를 공유하는 파트너로 대우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권위적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순종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라. 내 계획이 무엇인지 알라. 그러면 네가 왜 순종해야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이해에 기초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순종은 억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신뢰는 투명성과 정보 공유에서 나옵니다.

 

4. 다감각적 증명 (4:1-9)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모세의 세 번째 핑계는 "그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심리학에서 '투사(projection)' 라고 합니다. 자신의 불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긴 신학 강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은 이러하다"라는 추상적 설명 대신,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선을 하늘이 아닌 땅으로, 멀리가 아닌 가까이로, 미래가 아닌 현재로 돌리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내게 무엇이 주어진다면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게 이미 주어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교육학에서 말하는 '자원 기반 학습(resource-based learning)'의 원리입니다. 없는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이르시되 이를 행하여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매일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시고, 다시 지팡이로 되돌리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은 이집트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왕관에는 코브라(우라이우스, uraeus)가 새겨져 있었고, 왕의 신적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애굽의 마술사들도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출 7:11-12 참조). 이 이적은 모세에게 "네가 가진 것으로도 바로의 권위에 맞설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흰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품에서 내어보니 손이 본래의 살로 돌아왔더라 또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의 손을 나병 들게 했다가 깨끗하게 하십니다. 나병은 부정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공동체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부정함에서 깨끗함으로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탈출이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부정함에서 거룩함으로의 변화임을 상징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이적을 준비하셨습니다. 나일 강은 애굽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신격화했습니다. 그 물이 피로 변한다는 것은 애굽의 신이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이상학적 논증이 아닌, 모세가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 경험을 통해 확신을 주셨습니다. 경험학습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구체적 경험 → 반성적 관찰 → 추상적 개념화 → 능동적 실험의 순환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배운다고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불기둥을 내리거나 천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감당할 도구가 이미 그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흔히 "내게 무엇이 있어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지식, 더 큰 은사, 더 나은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가진 것,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을 통해 일하십니다. 신약의 오병이어 사건과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기 위해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추상을 구체로 만드는 것, 하나님의 대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관념의 세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우리의 손과 발이 닿는 실제 삶의 영역으로 내려오십니다.

 

5. 실질적 보완 (4:10-17)

1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핑계는 가장 개인적입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모세에게는 실제로 유창하게 카리스마 있는 언어 기술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무거운 입', '무거운 혀'라는 의미로, 말더듬이나 유창성 장애를 암시합니다. 출애굽기 6:12, 30에서도 모세는 자신을 '할례받지 못한 입술'이라고 표현합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말해야 했고, 수백만 백성 앞에서 연설해야 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웅변은 리더십의 핵심 자질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수사학(rhetoric)을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여겼고, 로마에서도 웅변가는 존경받는 위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말을 잘 못하는 것은 큰 약점이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네가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논증을 하셨습니다. "입을 만드신 분이 그 입을 사용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장애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모세는 여전히 거부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이것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모세는 더 이상 핑계가 없습니다. 그는 가기 싫은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고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성경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고"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첫 번째 핑계("내가 누구입니까?")에 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정직한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두 번째 핑계("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에도 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합리적 질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핑계("그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에도 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상 가능한 우려였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거부("다른 사람을 보내소서")에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의 완고한 불순종은 그분의 거룩한 분노를 촉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하시면서도 모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론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생물학적, 기질적 한계를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시스템을 통해 해결하셨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관계를 재정의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론은 그것을 백성에게 전합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상호보완적 동역의 구조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언급하십니다. 모세는 여전히 그 지팡이를 들고 갈 것입니다. 그의 약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곁에는 아론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그 한계를 보완할 다른 지체들을 보내주십니다. 현대 조직 이론에서 말하는 '강점 기반 리더십(strengths-based leadership)'의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약점을 고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은 시스템으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정 우리의 핑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끝없는 거부는 불순종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노하시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출애굽기 3-4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대화 방식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섯 단계의 세심한 과정을 통해 모세의 마음을 열고, 그의 두려움을 해결하고, 그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그의 의심에 구체적으로 답하고, 그의 한계를 보완해 주셨습니다.

첫째, 존재론적 공감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아셨습니다. 그리고 내려가셨습니다. 단순히 관찰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셨습니다.

둘째, 정체성 재정의로 이어가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 모세의 정체성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적 열등감을 신앙적 확신으로 전환하셨습니다.

셋째, 계시의 개방으로 깊이를 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공개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시고, 모세를 계시를 공유하는 파트너로 대우하셨습니다.

넷째, 다감각적 증명으로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팡이와 손이라는 구체적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추상을 구체로 만드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이미 있는 것으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실질적 보완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모세의 약점은 동역자 아론으로 보완하셨습니다. 한계를 수용하시고, 시스템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야 할 모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양을 칠 때, 제자를 양육할 때, 동역자와 함께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강압적 명령이 아니라 공감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아야 합니다. 능력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정체성을 재정의해 주어야 합니다. "너는 이것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정보 독점이 아니라 계시 공유로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합니다.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경험으로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완벽주의가 아니라 보완의 시스템으로 동역해야 합니다.

 모세는 결국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출애굽기에 기록한 대화의 방식은 우리가 다른 영혼들에게 나아갈 때 실행해야 할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경험한 사람들로서,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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