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제 6 강 메시지_아산UBF
행복한 사람들
말씀 / 마태복음 5:1~16
요절 /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습니다(1절).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제자란 가르침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첫 관문 팔복(3–12절)을 말씀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시고 소금과 빛(13–16절)을 말씀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 복이 있다는 것(마카리오스)은 신들이 누리는 축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단어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박해받는 자에게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의 기준과 완전히 다릅니다.
팔복의 내용을 보면 첫 네 복(3–6절)이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를 다루는 것이고, 다음 네 복(7–10절)은 이웃을 향한 바른 관계를 다룹니다. 팔복은 소금과 빛으로 세상에 파송되는 선교적 삶으로 완결됩니다(13–16절). 팔복은 제자의 삶 전체를 보여주는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아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런 사람이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3절)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구걸하는 자, 즉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어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극빈자를 가리킵니다. 겸손한 정도가 아닙니다. 영적 차원에서의 철저한 비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공로도 성취도 내놓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가난’ 이란 단어를 언급하니까 돈 없어야 복이 있는 줄로 여깁니다. 중세 때, 어떤 사람들은 돈 가지는 것을 죄악시 하였던 그룹이 존재하기도 하였습니다. 돈 많은 부자이면서 헌금 많이 한 사람이 ‘제가 주님께 드린 것이 너무 없다’며 눈물로 회개하는 일도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 드린 시간도 없고 주님께 헌신한 것도 없이 하나님께 인색하면서도 ‘내가 그래도 하나님을 많이 섬겼고 자신은 영적인 사람’이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이 드리고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즉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심령에 임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맛보는 특별한 행복입니다.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나는 특별하다. 나는 영적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영적 우월함이 있다. 내가 하나님께 할 것은 다 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나라에서 어떤 은혜를 맛보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야말로 천국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부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은 누가복음 세리의 기도입니다. 그는 돈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죄인로소이다’ 하며 하나님 앞에서 가슴아파하였습니다(눅 18:9–14).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 나라의 입구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 은총의 가장 기본입니다. 저도 30대 때, 대전센터 있었는데 일생을 주님께 드려 타국에서 온갖 상처받으며 헌신하다가 잠시 귀국한 선교사님은 ‘저는 드린 것이 너무 없다’며 가슴아픈 눈물을 흘리는데, 자기 원하는대로 무절제하게 지내던 어느 젊은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은 생각하며 살았고 지금도 나는 꽤 영적이다’며 소감발표 하는 것을 본 적 있습니다. 그때 목자님이 ‘인생을 주님께 드린 선교사는 드린 것 없다’며 눈물 흘리고 자기원하는대로 산 사람은 ‘자기가 영적인 사람이라’하는 것을 본다 코멘트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2. 애통하는 자 (4절)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본문 말씀의 '애통(펜테오, πενθέω)'은 장례식의 통곡처럼 깊고 격한 슬픔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통곡, 세상의 죄악에 대한 아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회개를 말합니다. 감각이 마비된 사람,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위로받을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세상의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진정한 치유를 받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자가 아니라 아픈 사람입니다(마 9:12). 본문 말씀의 ‘하나님의 위로’('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곁에 불러서 함께 머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 머무십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3. 온유한 자 (5절)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프라오스, πραΰς)'는 문자적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부드러움’입니다. 힘이 없어 굽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사납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2:3은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이집트 왕자로 자랐고 홍해를 가른 모세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능함과 강인함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내려놓았습니다. 온유는 강한 자, 옳은 자가 하는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약속하십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 정복하는 사람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논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합니다. 2인자 주언라이가 중국사람들 마음로부터의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고, 젊어서는 늘 쫓겨나고 밀려났던 덩샤오핑이 최종승자가 되었습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는 죽여버린다’는 오다 노부다가의 나라는 짧게 일어섰다가 몰락하였지만 ‘새가 울지 않으면 울때까지 기다린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후 승자가 되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절)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광야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은 절박한 생존의 이슈입니다. 예수님은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를 향한 갈망이 그런 절박함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윤리적 도덕적 향상에 대한 바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향한 절실하고 간절한 열망, 목숨을 거는 갈망입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는 절박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배부르게 하십니다.
"갈망이 깊은 만큼 충만함도 깊습니다. 하나님은 주리고 목마른 영혼을 결코 빈 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6절까지의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다루었다면 7절부터는 복있는 사람의 ‘관계’를 다룹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7절) — 주는 것이 받는 것의 통로가 된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엘레에몬, ἐλεήμων)'은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데 헤세드는 언약적 사랑, 곧 관계 안에서 끝까지 돌보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긍휼은 불쌍하다고 느끼는 감정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쓰러진 자 곁에 멈추고 그를 구하고 옮기고 비용을 지출하였듯이(눅 10:33), 긍휼히 여기는 자는 고통받는 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밉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받는다는 것은 인과 논리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긍휼을 실천하는 삶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이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긍휼을 실천하며 행동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긍휼을 주는 자를 가장 먼저 변화시킵니다. 우유 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긍휼은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영혼에 대하여 무관심인 사람은 긍휼을 배울 수 없습니다. 긍휼을 알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더 심각한 것은 다른 인생을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익을 위한 수단, 자기영광을 위한 도구로 양들을 이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배울 수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1학년 후배 하나가 성경공부하러 왔는데 인생문제가 아주 심각하여서 금방 넘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 후배를 위한 긍휼을 행하는 것은 꽤 많은 수고와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 후배가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돕고 섬겨서 자란 양이 서사라 목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서사라 목자가 얼마나 헌신적인 사람인지 압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 (8절)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카다로스, καθαρός)'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다른 것들이 섞이지 않은 상태, 단일한 목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영혼입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마음의 순수함은 오직 한 가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원하고, 세상의 인정도 원하고, 개인의 이익도 원합니다. 예수님은 그 나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분열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복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본다(ὄψονται τὸν θεόν)'는 것은 시각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예전에는 청결한 마음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정욕’을 많이 꼽았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갖는 면에서 가장 회개가 안 되는 것이 모임 안에서 이해받으려는 마음, 모임 안의 사람들에게 관심과 칭찬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모임 안에서 영향력 갖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청결한 마음이 아니면서 청결한 줄 압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구실과 핑계를 갖고 두 마음을 위장하기 때문에 회개가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사랑하고 원하여야 청결한 사람이 누리는 복을 누립니다.
7. 화평하게 하는 자 (9절)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에이레노포이오스, εἰρηνοποιός)'는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의 회복이며, 깨어진 것이 치유되고 분리된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인생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도 하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줍니다. 하나님 없이 사느라 상처받은 이들을 화평으로 인도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흘러나오는 화평은 우리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우리의 캠퍼스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하여 힘쓰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10–12절)
마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여덟 번째 복은 앞선 일곱 복의 결과입니다. 의를 갈망하고, 화평을 만드는 삶은 세상과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날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박해가 하늘의 상(μισθός)과 연결되어 있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2절)—우리가 고난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렬에 함께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사도들이 걸었던 그 길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나아간 믿음의 선배들이 이 복의 산 증인들입니다.
13절부터는 복 있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세상에서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향해 파송된 사람 — 소금과 빛 (13–16절)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3절)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예수님 시대에 보존과 맛, 정결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소금으로 급여를 받기도 했습니다('샐러리/salary'의 어원). 레위기 2:13은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소금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소금의 역할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부패를 막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는 핵심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의 도덕적·영적 부패를 억제하는 존재입니다. 둘째, 맛을 살립니다. 소금 없는 음식은 맛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세상에 의미와 깊이를 더합니다. 셋째, 상처를 정결하게 합니다. 소금은 아프지만 치유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불어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팔복의 삶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 세상의 가치에 동화된 제자는 소금의 기능을 잃은 것입니다.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라는 표현은 무섭습니다. 소금이 소금다울 때 비로소 소금입니다.
2.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4–16절)
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은 자가 빛이 됩니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서 빛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이미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산 위의 동네'는 숨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공개적으로 드러납니다. 삶 전체가 증거입니다. 둘째, '등경 위의 등불'은 의도성 원리입니다. 등불은 목적을 위해 켭니다.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등불을 등경에 둘 때 등불의 빛은 선택적으로 비추지 않습니다. 차별 없이 방안의 사람에게 비춥니다. 빛이 비쳐진 결과 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절)—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이 결국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칼라 에르가, καλὰ ἔργα)'이란 팔복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소금의 삶이 빛의 삶으로 드러나고, 빛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아갑니다.
"소금은 자신을 녹여 세상에 스며들고, 등불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힙니다. 제자의 삶은 이 둘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④ 오늘 우리에게 — 팔복을 삶으로 번역하기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복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며 우리에게는 읽고 은혜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하는 선언입니다. 팔복이 삶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앞으로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부터 이미 주신 바 된 정체성입니다. 관건은 우리가 그 정체성대로 살고 있는가입니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를 갈망하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을 만들고, 의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삶—이 여덟 가지 모습은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제자의 인생이 가지는 실제 모습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 많이 가진 자,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선언을 뒤집으십니다. 팔복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실재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빛이 그의 삶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비춥니다. 하늘에서의 상, 위로, 기업, 배부름, 긍휼히 여김,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이 모든 복이 이미 시작된 것이며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고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팔복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이웃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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