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8일 주일메시지(고린도전서 제 12 강)_아산UBF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
말씀/고린도전서 14:1-40
요절/고린도전서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 특히 방언의 은사를 열심히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사 사용의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무엇을 추가하여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부. 예언이 방언보다 나은 이유 (1-25절)
1절을 보십시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먼저 "사랑을 추구하라"고 명령합니다. 13장의 사랑의 찬가를 마친 후 곧바로 이 명령을 주는 것은 사랑이 모든 은사 사용의 토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은사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라고 말합니다. '사모하다'는 '열심히 갈망하다, 뜨겁게 추구하다'는 의미입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 은사 중에서도 예언을 우선 사모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왜 예언을 더 사모해야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은 하나님께 직접 말하는 은사입니다.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람은 못 알아 듣습니다. '비밀'이란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 개인으로는 은혜 받고 신앙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은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예언은 다릅니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유익을 줍니다. 덕을 세웁니다. 영적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권면합니다. 격려하고 위로하며 힘을 북돋아줍니다. 뿐만 아니라 위로합니다.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고 슬픔을 치유합니다.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 말씀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한 사람의 예언을 통하여 여러 사람이 유익을 얻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바울은 방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방언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며, 개인의 영적 생활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면 예언이 더 낫습니다. 방언도 통역이 있으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통역이 없다면 예언만 못합니다. 은사에 우열이 있지 않지만, 공동체 유익이라는 기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은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바울은 자신을 예로 듭니다. 만일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 같은 이해 가능한 내용이 있어야 유익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통찰이고, 지식은 영적 진리에 대한 이해이며,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고, 가르침은 체계적인 교리 교육입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7-9절에서 바울은 여러 비유로 이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지라도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이라" 악기도 분명한 음을 내지 못하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습니다.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음악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나팔은 전쟁터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병사들이 진격해야 할지 후퇴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지 않으면 공중에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소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고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 모든 언어는 나름의 문법과 의미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외국인'이 됩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 있어도 의사소통이 안 되면 서로 외국인처럼 느껴집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하는데 언어 때문에 분리된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본질에 어긋납니다.
12절이 이 단락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습니다. 이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풍성하기를'은 '넘치다, 탁월하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사를 구할 때의 올바른 동기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 것이요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영으로 기도하면 자기 영은 기도하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은 인간의 영을 가리키고, '마음'은 이성, 지성, 이해력을 의미합니다. 방언 기도는 영적으로는 유익하지만 이성적 이해를 수반하지 않으면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바울은 영성과 이성의 분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바울의 해결책은 '둘 다'입니다. 영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하며, 영으로도 찬송하고 마음으로도 찬송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성과 이성의 조화입니다. 감정적 체험과 지적 이해가 함께 가야 합니다. 만일 영으로만 축복한다면 일반 회중이 어떻게 "아멘" 하겠습니까? "아멘"은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공적 예배에서 회중의 동의와 참여를 나타냅니다. 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아멘" 할 수 없습니다. 방언으로 하는 감사는 아름답게 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입니다. 내 기도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없다면 예배에서 적절하지 않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더 많이 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방언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격이 있어서 이 주제를 다룹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다릅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습니다. 5:10,000의 비율입니다! 바울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이해 가능한 가르침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합니다. 공적 예배에서는 이해 가능한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는 것은 사고방식이 미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방언만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태도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가 받은 선물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반면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합니다. 악의, 악한 동기, 이기심에 대해서는 순진하고 무지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 즉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성숙함은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사랑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바울은 이사야 28:11-12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자 앗수르의 다른 방언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침략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들었습니다. 방언은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여기서 '표적'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적 징표를 의미합니다. 반면 예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언은 믿음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돕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만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보면 "미쳤다" 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 방언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외부인이 보기에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드는 모습은 정신이상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다 예언을 한다면 믿지 않는 자나 알지 못하는 자가 들어와도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책망을 들으며'는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판단을 받고'는 양심이 하나님 앞에 조사받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숨은 일들'은 내면 깊숙이 숨겨진 생각과 동기들입니다. 예언, 말씀 선포는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양심을 일깨웁니다.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영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그리하여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도의 열매입니다. 방언은 표적 기능이 있지만 오히려 불신자들을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언은 불신자의 마음을 드러내고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어느 것이 전도에 더 유익합니까? 예언입니다.
2.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하라 (26-40절)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오늘 말씀의 요절입니다. '그런즉'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예배는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각각'이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찬송시는 영감받은 찬양을 의미하고, 가르치는 말씀은 교리적 가르침을,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통찰을,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를, 통역함은 방언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것은 성령의 풍성한 역사입니다. 문제는 이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입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덕을 세운다'는 것은 건물을 짓다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공동체를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 사용의 목적과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은사는 오용되고 교회는 혼란에 빠집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바울은 방언 사용에 대해 구체적인 규칙을 제시합니다. 첫째, 한 번에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만 해야 합니다. 숫자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왜 제한해야 합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면 예배가 지루해지고 회중이 지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차례를 따라 해야 합니다. 동시에 여러 명이 하면 혼란스럽습니다.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셋째, 한 사람이 통역할 것입니다. '한 사람'은 통역의 일관성을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사람이 제각각 통역하면 메시지가 일관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넷째,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좋지만, 공적 모임에서는 자제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은사 체험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원칙입니다. 자기 은사를 자제할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 것이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하다'는 영들을 분별하고 메시지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이라고 다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말씀과 성령의 증거로 검증해야 합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예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분별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언이 개인의 독점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여러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계속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목적은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 받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하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통제 밖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은 사람의 영을 강제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제재를 받는다'는 복종하다, 통제되다는 의미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자기가 말할 때와 멈출 때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강하게 임해서 멈출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의지와 자제력을 존중하십니다. 만일 누가 "성령 때문에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때문입니다. '무질서'는 혼란, 소요, 불안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화평'은 평화, 조화, 안정을 뜻합니다. 혼란과 무질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질서 있고 화평합니다. 만일 예배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나 육신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예배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것이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이 말씀은 역사적·문화적 배경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명령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다루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이 예배 중에 무질서하게 질문하고 떠들어 혼란을 야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배 중 설명을 듣고 이해하지 못해 남편에게 큰 소리로 묻곤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무질서를 막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에 이른 것 같이'는 창세기 3장 16절이나 일반적인 질서 원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복종할 것이요'는 교회의 질서에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배우고 싶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의 은사나 사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성 예언자들을 인정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자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에 대해 언급합니다. 또한 빌립보서에는 여러 여성 동역자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배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바울은 반문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마치 자기들만 옳고 자기들만 특별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식이 유일하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 교회가 자기 멋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가 알지 못하면 그는 알려지지 못한 자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영적 능력을 과시했음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신령한 사람이라면 바울의 가르침이 주님의 명령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이러한 가르침을 존중합니다. "만일 누가 알지 못하면 그는 알려지지 못한 자니라"는 경고입니다.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자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신령하다 주장해도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진정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런즉'은 모든 논의를 요약합니다. 첫째, 예언하기를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추구하십시오. 둘째,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마십시오. 방언은 여전히 가치 있는 은사입니다. 셋째,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십시오.
바울은 균형을 강조합니다. 예언을 우선시하되 방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사모하되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품위 있게'는 적절하게, 단정하게, 품격 있게라는 뜻입니다. '질서 있게'는 순서대로, 체계적으로, 질서를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시에 성도들을 덕 세우는 시간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이 질서 있는 예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질서 깨는 일을 합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의 화평을 어지럽게 합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예배 중 질서 없이 방언과 예언을 하는 일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예배 도중에 소리질러 궁금한 것 묻고, 예배 도중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주저 없이 일어나 소리내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을 왜 했겠습니까? ‘나 이렇게 영적이니까 알아달라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알려야겠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도 제발 어떤 분은 ‘영적인 체험 덜 했으면’ 하고 주변에서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뭘 깨닫기만 하면, 그것을 근거로 주변을 모두 자기에게로 집중시키려고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진보를 신속히 널리 알려야 만족합니다.
내가 깨닫고 내가 은혜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오늘 성경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까지도 자기를 내세우는데 동원하는 일이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목숨까지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더 이상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높여주시려고 오셔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나를 위하여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서 풍성한 인생 되게 해주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데, 굳이 내가 나를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은 높여주시는 하나님을 못믿겠다는 것입니다. 굳이 나의 이익을 내가 챙기겠다는 것은 나를 부요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를 위하여 목숨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제발 은혜와 은사를 가지고 자아실현 하겠다 열 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스스로 막아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형제를 세워주고 살려주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 굳게 세워지는 일에 온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항상 자신의 동기를 점검하는 연습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를 위한 것인가? 형제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법 선택의 기준을 새로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이웃들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형제들과 이웃들이 이해 가능한가? 나의 방법이 원칙과 질서가 있는가? 우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내가 한 말과 내가 행한 것이 어떠하였는지 돌아보고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고 확장되고 있는가? 형제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가고 우리 이웃들이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게 되었는가?
덕을 세우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을 구체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개인이 말살 되거나 희생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과 영혼을 진정으로 복되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형제들의 믿음과 성장을 세워줄 수 있는 길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다른 이웃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자 하는 일에 무관심한 채 20대, 30대를 보내고 항상 자기 세우는 일에 집착하면 40대, 50대, 60대에도 자기 세우는 일만 하느라 어린 아이 같은 삶을 삽니다. 나의 은사 보다 교회의 덕이 우선입니다. 나의 체험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산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는 일에 큰 관심 가지는 주의 종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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