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부활 메시지_아산UBF_유스테반목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19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는지 함께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취업과 성과라는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가가 삶의 기준이 된 시대입니다. 스펙을 쌓고 자격증을 취득하며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여겨집니다. 그 안에서 신앙은 점점 삶의 중심에서 밀려납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오늘 내 삶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당장 눈앞의 문제들에 가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특히 20대에서 30대 청년층에서 그 감소 폭이 가장 큽니다. 바쁜 일상에서 신앙이 삶과 따로 도는 느낌, 예배를 드리지만 평일의 내 삶과 연결이 안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8장은 그 질문에 답을 줍니다. 부활은 일 년에 한 번 기념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향한 사명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권세 위에서 사명 앞에 한 걸음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마무리하러 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여자들에게 무덤은 이미 닫힌 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실망이었고 좌절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구원자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 자리는 오늘 우리의 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는 것 같을 때, 믿음으로 나아갔는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 마치 무덤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새벽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2절에서 4절을 보십시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졌습니다. 로마 경비병들이 두려움에 떨며 쓰러졌습니다. 마태복음 27장 62에서 64절을 보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염려하여 빌라도에게 요청해 경비병을 세우고 돌로 봉인까지 해두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부활했다고 속일까 봐 철저히 막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가두어 두려 했던 모든 시도가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의 힘은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이 닫힌 것처럼 보여도, 상황이 막막해 보여도,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합니다.
5절에서 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말씀하시던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어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 말씀하셨고, 17장 22절에서 23절, 20장 18절에서 19절에서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살아난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없었고,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정확히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믿지 못했을 때도, 심지어 도망쳤을 때도 하나님의 계획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가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하나님의 계획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 이해와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도,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7절에서 8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보라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하더라." 천사는 소식을 받은 즉시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기쁨이 동시에 뒤섞인 상태였지만 달음질쳤습니다. 이해가 다 된 다음에, 확신이 생긴 다음에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은 자리에서 바로 움직였습니다. 무서움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움직인 것도 아닙니다. 무서움과 기쁨이 함께 있는 상태에서 움직였습니다. 순종은 모든 감정이 정리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면서도 말씀을 향해 내딛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준비된 다음에 움직이려 하면 영원히 움직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은 자리에서 내딛는 것이 먼저입니다.
9절에서 10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달음질치는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발이 있는 실체로 그들 앞에 서셨습니다. 부활은 심리적 위로나 막연한 영적 느낌이 아닙니다. 실체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실체임을 믿을 때 실제적인 순종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여자들에게 먼저 평안을 건네시고,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 오라 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2절을 보면,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처음 사역을 시작했던 곳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처음 부르셨던 곳,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던 그 자리로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갈릴리는 관계가 회복되고 권세를 덧입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새롭게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11절에서 15절을 보십시오. 경비병들로부터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돈을 주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와 기득권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덮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작은 죄와 인간적인 생각들을 초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영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역사 자체를 외면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17절을 보십시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제자들은 말씀대로 갈릴리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의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의 연약함과 의심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 솔직함이 이 기록의 신뢰성을 높입니다. 믿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 우리도 잘 압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 경험, 그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솔직한 자리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말씀을 여러 번 들었어도, 기도를 드려도 여전히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본 제자들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이 의심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들의 내적 결단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실체로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의심하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나아오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이 먼저 나아오셨습니다.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제자들 앞에 서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고 죽으신 예수님이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서신 것입니다. 이 권세는 인간이 부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께 그 모든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근거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우리의 확신이나 준비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에서 출발합니다.
요절 말씀 1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이 말씀 앞에서 조금 부담을 느꼈었습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내 자리에서 이 사명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성과 중심의 사회 안에서 오래 살다 보면 신앙도 어느새 결과로 재게 됩니다. 내가 몇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가,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결과가 없으면 지치고, 이 사명이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연구실에서 논문 쓰기도 바쁜데, 제자 삼는 사명이 내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싶은 마음도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준비가 다 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명의 근거는 제자들의 능력이나 준비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가라." 내가 충분하지 않아도, 아직 흔들리고 있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그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의 이 말씀은 흔히 '지상명령'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열한 명이었던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오늘날 전 세계 수십억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은, 각 시대마다 이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예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도, 누군가가 이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해준 결과입니다. 이제 그 사명이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이 사명이 계속되는 방식입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도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 민족은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특정 민족이나 계층,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내가 매일 마주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명의 대상입니다.
20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말씀을 나누고 함께 지켜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그 관계가 지속되도록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한 번 전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말씀을 배우고 함께 삶 속에서 지켜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말씀을 공급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잘 전해야 변화된다는 부담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가르치시고, 직접 삶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옆에 있는 한 사람과 함께 말씀 앞에 서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삶의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직장, 연구실 사람들과 같이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혼자 감당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서"라는 말은 이미 공동체 안에서 함께 가는 것을 전제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갈릴리로 갔고, 함께 예수님을 뵈었고, 함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의 짐을 나누며, 함께 말씀 앞에 서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혼자입니다. 소셜미디어로 수백 명과 이어져 있지만, 막막한 순간에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연구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논문을 쓰고 각자 결과를 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졸업과 진로 앞에 말 못할 불안을 혼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어도 서로의 속사정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곳이 바로 그 자리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한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말씀 앞에 서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경험했기에 그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막막한 자리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야 옆 사람의 막막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 해결함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 수 있습니다.
20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예수님은 사명을 주시면서 이 약속을 함께 주셨습니다. 이 사명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자기 효능감을 강조합니다. 내 힘으로 해내는 것,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성숙함으로 여깁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습니다. 신앙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명만 주시고 떠나시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잘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하고 의심할 때도, 막막하고 지쳐 있을 때도, 예수님은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산에 모여 의심하고 있을 때도 예수님이 먼저 나아오셨던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나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시기 전에 그들을 회복시키셨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실패를 먼저 묻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로 부르시고, 나아오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신앙에서 실패한 것이 있어도, 믿음이 흔들렸던 때가 있어도, 예수님은 그것을 먼저 들추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아오셔서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보내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졸업 논문 발표를 앞두고 데이터가 도무지 나오지 않던 때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발표 날짜는 정해져 있고 결과는 없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워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포기해야 할 것 같은 그 자리에서 기도하며 그 막막함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 버티는 것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 약속의 말씀이 지금도 그냥 문자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히는 논문과 취업과 진로와 관계의 문제들을 예수님께로 들고 나아가 해결하는 실제적인 믿음의 체험들을 해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먼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옆에 있는 한 사람에게도 그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먼저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해결함 받지 못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경험한 말씀의 능력이 있어야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삶의 현실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논문이 막막하면 그것을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진로가 불투명하면 그것을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관계가 어려우면 그것을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고, 말씀을 통하여 해결함 받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옆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일이 일어날 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사명이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처럼, 오늘 이 말씀은 우리 각자를 각자의 자리에서 새롭게 부르고 있습니다. 연구실에서, 직장에서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사명의 현장입니다. 멀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한 사람,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이 사명의 시작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사람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말씀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제자를 삼는 일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사명을 받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 후에 우리가 돌아가는 그 자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명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결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내십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 사명은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무서움과 기쁨으로 달음질쳤던 것처럼, 의심하는 제자들에게도 사명을 주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 시작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일상과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가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사람씩 예수님께로 이끄는 사람들이 되기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이 사명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져가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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