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빛나는 노벨상 가족

퀴리 부인 - 노벨상에 빛나는 노벨상가족

작성자서해원당|작성시간22.03.31|조회수1,148 목록 댓글 0

마리 퀴리(Marie Curie, 퀴리부인) - 빛나는 노벨상 가족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

 

출생 : 1867년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사망 : 1934년 7월 4일 (66세), Passy, 프랑스

국적 : 폴란드, 프랑스(결혼 후)

분야 : 물리학, 화학

소속 : 파리 대학교

출신 대학 : 파리 대학교, 지도 교수는 앙리 베크렐

주요 업적 : 방사능

수상 : 노벨물리학상 (1903), 노벨화학상 (1911)

종교 :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나 모친의 사망 후 불가지론자로 전향.

자녀 : 이렌 졸리오퀴리이브 퀴리

배우자 : 피에르퀴리(물리학자) (1859.5.15.~1906.4.19)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폴란드어: Maria Skłodowska-Curie), 폴란드 바르샤바,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

- 본명 :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폴란드어: Maria Salomea Skłodowska),

프랑스식 이름 마리 퀴리(프랑스어 : Marie Curie).

 

-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 수상자.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인물로서는 최다 기록.

 

- 마리 퀴리는 1867년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브로니스와바는 중학교 교 사,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Władysław Skłodowski)는 바르샤바 교육청 장학사.

형제로는 오빠 유제프(Józef, 1863년생)와 조피아(Zofia, 1862년생), 브로니스와바(Bronisława, 1865년 생), 헬레나(Helena, 1866년생) 언니 셋이 있었다.

 

- 10세 때 폐결핵을 앓던 어머니와 사별하였고, 장학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실직하기도 했으며,

큰 언니 조피아가 요절하여 혼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였다. 당시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갈 결심을 하였다.

 

유학 생활 여학교를 졸업한 마리는 남학생만 뽑는 바르샤바 대학교와는 달리, 성 차별이 없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으나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3년간 시골의 부유한 농가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어 고용주의 딸과 아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고용주의 허락을 받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취직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마리는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형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 부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였다.

 

브로니스와바와 마리가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폴란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계몽주의자였다면, 형부 카지미에시는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없이는 민중 해방이 없다는 냉철한 현실 이해를 주장한 사회주의자.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여 J. H. 푸앵카레, G. 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며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라듐의 발견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학위를 취득한 후 1895년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였고 피에르 퀴리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년 ~ 1906년)는 1898년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pitchblende, 역청우라늄석)에서 염화바륨에 소량 섞여있는 형태로 염화라듐을 처음 분리∙발견하였고 1902년 8톤의 폐우라늄 광석을 처리하여 0.1g의 순수한 염화라듐을 얻었다. 1910년에는 마리 퀴리가 염화라듐을 전기분해 시켜 금속 라듐을 얻었다.

 

마리 퀴리가 살던 시대에는 방사능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방사능 물질 라듐은 미용은 물론 정신장애 치료에까지 효과가 있다는 위험한 선전이 아무런 근거 없이 주장되었고,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느 화장품이건, 라듐이 들어간다고 쓰어져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완판이 되었고 굉장히 인기가 있던 제품이었다.

 

교수 생활

1906년 피에르 퀴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가 근무하던 소르본대학교에서 1906년 11월 5일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마리 퀴리는 미리 강의 내용을 확인하는 준비를 하여 남편이 가르친 내용을 이어서 강의하는 꼼꼼함을 보여주었다. 이 일로 소르본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는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거부했다.

 

핵물질(방사능피폭에 따른 사망

라듐의 위험성이 제기된 것은, 영화관에서 영화 상영작 포스터 페인트질(페인트 안에 라듐 성분이 들어가 있음)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죽어가면서였다. 마리 퀴리도 1934년 스위스요양소에 입원하여 그 해 7월 4일 방사능으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로 사망했다.

 

업적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인물로서는 최다 기록.

 

1903 :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07년 :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

1910년 : 금속 라듐의 분리도 하여,

1911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 그 공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었다.

마리 퀴리의 딸 부부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이다.

 

프랑스의 보수성,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공세,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문제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었다.

 

수상 : 노벨물리학상 (1903)

        데이비 메달 (1903), 마테우치 메달 (1904)

        노벨화학상 (1911)

 

피에르 퀴리 물리학자 (마리 퀴리의 남편)

출생 : 1859년 5월 15일 프랑스 파리

사망 : 1906년 4월 19일 (46세) 프랑스 파리

국적 : 프랑스

분야 : 물리학

배우자 : 마리 퀴리 (1895년–1906년)

자녀 : 이렌 졸리오퀴리이브 퀴리

출신 대학 : 소르본 대학교

지도 교수 : 가브리엘 리프만

지도 학생 : 폴 랑주뱅

주요 업적 : 방사선

수상 : 노벨물리학상 (1903), 마테우치 메달

 

-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결정학자기압전효과방사선 분야의 선구자.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두 명의 딸(이렌 졸리오퀴리이브 퀴리)을 두었다.

1903년 부인 마리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1906년 직장인 소르본대학교에 가던 중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년 5월 15일 ~ 1906년 4월 19일) 는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결정학, 자기, 압전효과, 방사선

분야의 선구자이다.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1903년 부인 마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1906년 직장인 소르본대학교에 가던 중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이브 퀴리 (작가)

- 프랑스와 미국의 국적을 가진 작가, 언론인, 국제기구 활동가, 피아노 연주자

출생: 1904년 12월 6일, 프랑스 파리

사망: 2007년 10월 22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요크 애비뉴

부모 :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형제 : 이렌 졸리오퀴리(언니)

조부모 :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 브로니스와바 스크워도프스카

수상 : 내셔널 북 어워드 논픽션 부문

 

이렌 졸리오퀴리 (프랑스어: Irène Joliot-Curie, 1897년 9월 12일~1956년 3월 17일)

        이렌 졸리오퀴리는 프랑스 파리 출생의 원자물리학자.

        아버지는 피에르 퀴리, 어머니는 마리 퀴리이고, 성씨 졸리오퀴리는 남편과 함께 쓰는 성.

        파리 대학에서 폴로늄의 알파 입자에 관해 연구해 학위를 취득하였고,

        1926년 어머니의 조수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결혼.

        1935년 : 인공 방사선 원소의 연구로 남편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1936년 : 어머니의 후임으로 파리 대학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레지옹도뇌르훈장을 수훈.

                 오랜 세월에 걸친 방사능 연구로 인한 백혈병으로 1956년 사망.

 

이브 퀴리 (Eve Curie)

                                                             

   이브 퀴리

 

본명 : 에브 드니즈 퀴리 라부이스(Ève Denise Curie Labouisse)

출생 : 1904년 12월 6일, 프랑스 파리

사망 : 2007년 10월 22일 (102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구

국적 : 프랑스 & 미국

직업 : 작가, 언론인, 반전 운동가, 피아노 연주자

배우자 :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

부모 :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친척 : 언니 이렌 졸리오퀴리

 

- 이브 퀴리(Eve Curie, 프랑스어: Ève Denise Curie Labouisse 에브 드니즈 퀴리 라부이스, 1904년 12월 6일 ~ 2007년 10월       22일)는 퀴리부인의 둘째딸로, 프랑스와 미국의 국적을 가진 작가, 언론인, 국제기구 활동가, 피아노 연주자. (일간지 기자)

- 1904년 12월 6일에 파리에서 물리학자인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부부의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어머니, 언니와             함께 올림픽 호를 타고 미국을 여행하였고, 1926년 언니 이렌이 결혼한 후에는 어머니 곁에 남아 1934년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돌보았다.

 

작가 (적성과 흥미를 찾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이 과학에 흥미가 없음을 발견한 이브는 1935년 어머니의 모국인 폴란드를 방문하여 어머니의           어린 시절의 자취를 확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37년 어머니의 전기인 "퀴리 부인"(프랑스어: Madame Curie)을

         출간 하였다. 이 책은 1943년 미국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사에 의하여 시나리오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 당시에는 리비아와 러시아, 버마, 중국 등지에서 전쟁 특파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샤를 드골이 주도한

                       대독(對獨) 프랑스 해방운동(FFL)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 일간지 기자 :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이브는 일간지 파리 프레스(프랑스어: Paris-Presse)의 부발행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국제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북대서양 조약 기구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 아동 구호 활동가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결혼 국제 기구 활동을 통하여 만난 미국 외교관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Henry Richardson Labouisse Jr.)와

           1954년 11월 19일 결혼.

         - 195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죽을 때까지 프랑스와 미국의 이중 국적을 유지.

          - 1965년 남편 헨리 라부이스 퀴리는 유니세프 대표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미국살이 1987년 남편이 사망한 후, 이브는 뉴욕에 기거하였다.

             이브는 헨리 라부이스와의 사이에 자녀 가 없었기에 헨리가 전 부인 사이에서 얻은 딸 앤 페레츠를 돌보았다.

      - 2005년에는 유니세프 활동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 2007년 10월 22일, 이브는 뉴욕 맨해튼의 서튼 플레이스에 자리잡은 자신의 자택에서 향년 102 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 자료 : 여성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마리 퀴리의 둘째딸이자, 베스트셀러 퀴리부인의 작가인 이브 퀴리가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2007년 10월 22일 별세했다고 AP통신이 25일 보도.   향년 102세.

-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둘째딸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이브 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리비아, 러시아, 미얀마, 중            국 등지에서 전쟁 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샤를 드골이 주도한 대독(對獨) 프랑스 해방운동(FFL)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이 밖에 이브 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 특별보좌관, 아동 구호 활동가, 프랑스 신문 ‘파리 프레스’ 발행         자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장례식은 뉴올리언스의 메타리 공동묘지에서 거행.

 

이렌 졸리오퀴리 물리학자

이렌졸리오 퀴리와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이렌 졸리오퀴리는 프랑스 파리 출생의 원자물리학자로, 아버지는 피에르 퀴리, 어머니는 마리 퀴리.

성씨 졸리오퀴리는 남편과 함께 쓰는 성. 파리 대학에서 폴로늄의 알파 입자에 관해 연구해 학위를 취득.

1926년 : 어머니의 조수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결혼.

1935년 : '인공 방사선 원소의 연구'로 남편과 함께 노벨화학상 수상.

출생 : 1897년 9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 1956년 3월 17일, 프랑스 파리

배우자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1926년–)

학력 : 파리 대학교

부모 :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여동생 이브 퀴리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프랑스의 원자물리학자.

부인 :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딸인 물리학자 이렌 졸리오퀴리. 졸리오퀴리는 마리 퀴리의 사위.

1925년 : 라듐 연구소에서 마리 퀴리의 조수가 되었으며 여기서 퀴리의 딸인 이렌과 사귀어, 1926년에 결 혼하였고, 이때 두 사람의 성을 붙여 '졸리오퀴리'가 되었다.

출생 : 1900년 3월 19일, 프랑스 파리 사망 : 1958년 8월 14일, 프랑스 파리

배우자 : 이렌 졸리오퀴리 (1926년–) 수상 : 노벨화학상레닌평화상

 

앙리 베크렐 (마리 퀴리의 지도 교수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바크웰 

방사선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형광광화학 등을 연구한 알렉산더 베크렐의 아들로 자연스럽게 연구의 길에 들어섰다.

- 1896년 우라늄염의 형광현상을 연구 중 방사선이 우라늄에서 발생해 사진 건판을 변화시키는 현상발견.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방사능의 SI단위인 베크렐의 이름은 앙리 베크렐을 기리는 것이다.

 

출생 : 1852년 12월 15프랑스 파리

사망 : 1908년 8월 25프랑스 르 크화식

학력 에콜 폴리테크니크리세 루이르그랑파리 기술 대학

수상 노벨 물리학상코플리 메달

우수한 학생 마리 퀴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