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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들이 지나고-1, 2

작성자섬 그리기|작성시간26.06.17|조회수20 목록 댓글 0

날들이 지나고 - 1

 

 제주도로 대학을 가게 된 것은 돌아보니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운명이 날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 들 때가 있다. 2, 3학년을 같은 담임 선생님 밑에서 보낸 나에게 선생님은 나의 제주도 행을 3번이나 원서를 써주지 않겠다고 극구 말리셨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제자가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라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선생님의 만류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신세계만 같았던 제주도로 마음은 이미 달아나고 있었다.

 

 셋째 언니의 고등학교 친구였던 경숙 언니의 고향이 제주도라서 경숙 언니에게 집을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언니는 아직 부모님이 살고 계신 제주도 집에 방이 있다고 거기에서 살라고 했다. 난 그저 제주도로 가는 게 좋아서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19802월에 그곳으로 향했다.

 

 제주도의 집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제주시가 아닌 중산간 높은 지역의 개발이 안 된 과수원 쪽의 집이었는데 나무로 불을 지펴서 밥을 하고 그 동네 어느 집이건 한쪽에는 감귤밭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서 밥도 해 먹어 보지 않았던 나는 어떻게 할지 몰랐으나 어찌어찌 적응해 갔는데 밥을 못해 먹는 것은 문제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돌아보기 바빴는데 과수원 사이사이로 난 오솔길과 아직 미처 수확하지 못했거나 그냥 내버려둔 것 같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노란색의 감귤,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에는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떨어져 수북이 쌓여 있던 갈색의 솔잎들이 폭신하게 다가오던 그 기분 좋은 발끝의 촉감, 과수원 안쪽 길을 더욱 들어가다 보면 수년 동안 겹겹이 쌓여있던 낡은 빛깔의 낙엽층, 자연이 퇴색되어 발효된 듯한 기분 좋은 오래된 낙엽의 눅눅한 냄새,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추던 제주도의 소문난 바람이 몰고 가는 회색빛 구름, 끊어진 듯하면 다시 또 이어지곤 하던 곳곳에 쌓아 놓은 짙은 검갈색 무게의 돌담, 육지에서는 쉬이 느낄 수 없었던 낮은 음역대와 같은 가라앉은 공기,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설레게 하고 가슴에는 이방인 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한없는 자유로움이 나의 온 세포를 들뜨게 또는 차분하게 만들었다.

 

 이곳이 좋았다. 이 설레는 곳에서 복숭아꽃이 피고 지는 봄이 지나고 진저리치게 울어대는 매미의 한 낮이 지나고 노랗게 감귤이 익어가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길은 걸어서 20분 정도를 들어가야 하는데 바로 솔잎이 깔려 있는 그 길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천지가 하얗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별로 없어 오로지 홀로 걷고 있는 듯한 고적함에 젖어들고는 했다. 밤이 오면 그 길은 달빛에 의해 눈부신 수십만 개의 희디 흰 결정체로 빛나고 나의 두 눈은 저 멀리 어느 이름 모를 세상에 고정된 듯 그 황홀함에 빠져들고는 했다.

 

 이것들은 희망에 의한 고립으로 가끔은 황홀한 외로움을 누리는 뿌듯한 호사를 경험했으니... 훗 날 나의 생에 진정한 고립이 왔을 때 그 호사의 값이 얼마나 높게 깊게 치뤄졌는지... 돌아보니 그때의 나는 막 어른이라는 생의 입구로 들어서는 시기였었다.

 

날들이 지나고-2

 

 제주도에서의 시간은 그림을 그리고 틈틈이 글을 쓰며 낮에는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동향에서 온 선배들과의 교류도 이루어졌고 3학년에 재학 중인 두 선배 언니들을 만난 후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우린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산골에 사는 나를 두 언니가 자신들의 자취방으로 내려와 살라고 볼 때마다 권유해 드디어 제주시로 방을 옮겼다.

그 시절 우리들은 아침에 눈을 제일 먼저 뜨는 이가 검은색 카세트를 틀어 지금은 흘러간 노래에 속하는 영화음악과 팝을 틀어서 잠을 깨우곤 했다. 그 기억 때문일까 지금도 잠이 깨기 전 음악이 흘러나오면 다시금 살만한 하루의 문이 열리는 듯한 감미로움에 기분이 좋아지고는 한다.

 

 대학시절의 꽃이라고 불리던 미팅도 했었다. 딱 한 번, 미팅을 주선했던 선배가 나눠준 종이를 하나씩 뽑으라고 했다. 내가 뽑은 건 삼장법사였다. 상대는 손오공, 그런데 아뿔사 진짜 손오공이 나타났다. 함께 시간을 조금이라도 보내야 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순간을 지나갈 수 있을까...만 머리에서 맴돌았다. 같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자고 상대가 말했던 것 같은데 난 차만 마시고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한 후 뜨거운 차는 시간이 오래 걸릴듯해 마시기 편한 시원한 주스를 시켜서 얼른 마시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 후 미팅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또한 나의 상대 손오공에게도 어떻든 대화도 제대로 안 해본 상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미안함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시절의 1장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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